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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밑줄긋기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by 소금눈물 2011. 11. 7.

07/12/2007 10:37




*
실은 그 순간이란 아무리 부정해도 내 무의식이 내내 상상해온 바로 그 순간이었다. 노래를 지운 빈 테이프를 하루 종일 듣는 것 같은 시골의 생활. 절대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없는, 산과 논과 개울과 나무들이 자리잡은 그대로,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버린 듯한 완료형의 나날 속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의 이름을 묻는 순간이란 그 본질을 다시 뒤흔드는 것이었다. 절벽에서 아득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기분, 발 밑이 무너지며 금세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저릿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p. 73

어떤 사람이 다시는 모르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일, 그 영혼을 보아버리는 일.
나는 즉시 그를 통째로 이해해버린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 이후에 오는 시간, 요컨대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그 시간이란 오히려 우리가 상대를 재확인하는 낭비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p. 82


"왜 사랑해서는 안되죠?"
"얽히는 게 귀찮으니까. 사랑은 언제나 사랑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생에 시비를 겁니다. 삶을 위협해요."

p. 84


장마가 시작되었다. 한결같은 빗줄기가 손님이 들지 않는 때묻은 중국집의 긴 주렴처럼 지겹도록 내렸다. 한결같은 소리로 한결같은 굵기로, 한결같은 속도로. 가끔은 거센 바람이 불고 한낮이 밤처럼 캄캄해지며 천둥과 번개가 지붕을 쪼듯이 무섭게 내려친 날도 있었다.

p. 103


"흔히들 더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더 많은 사랑을 한다고 착각을 하지만, 실은 정말로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끝까지 하는 자들은 나쁜 사람들이지. 보다 덜 선량하고, 부도덕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히스테릭하고 예민하고 제멋대로이고 불행하고 어둡고 자기 도취적이고 집요하면서도 변덕스럽고 독선적이고 질투하는 사람."

"......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군요."

자백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공감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상처받은 사람의 모습이지. 바닷물이 파란 것은 바다가 다른 색은 다 흡수하지만 파란색만은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 노란 꽃도 마찬가지에요. 노란 꽃은 다른 모든 색은 다 받아들이지만 노란색만은 받아들이지 못해 노란 꽃이 된 거죠. 거부하는, 그것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을 규정한 거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알아볼 수 있었어요. 당신이 안간힘으로 거부하고 있는 당신의 상처를. 거부한 나머지 상처 그 자체가 되어버린 당신을, 슬프게도 우리는 저항하는 그것으로 규정되는 존재들이지."


p. 134


새벽에 눈을 뜬 후부터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다짐한 말이 하나 있었다. 이제 그 말을 할 차례가 된 것이었다. 어리석은 게임이었다. 단 한 번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은 없었다. 모든 것은 그냥 혼란이었다. 이 지경에 와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있었다. 이를테면, 나를 사랑했던가 하는 따위의 질문.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고도 작별을 견딜 수가 있을까.....


p. 223


안개와 모래가 뒤섞인 바람이 뭉클뭉클 부는 회색 사막을 걷는 듯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고....
언젠가 문 없는 벽을 지나온 것만 같다. 그후론 나를 괴롭힐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평화. 가난과 고독. 불쑥불쑥 치솟는 화염같이 살갗을 데우는 기억들....

p. 283



전경린 <문학동네>


주구장창 지루하게 내리는 장마비를 저렇게 내게 깊이 각인시킨 글은 없었다.
나에겐 윤흥길의 장마보다도 전경린의 저 장마비가 나를 더 깊이 적신다.
잘생기고 시니컬한 이 시골우체국장을 얼마나 나는 흠모했던가. 그리고 서른 세살, 키를 잃고 망망대해서 머리를 날리며 서 있는 것 같던 미흔의 외로움에 얼마나 깊이 공감했던가.

그러게.. 그 빌어먹을 사랑은 무슨 게임이나 놀이가 될 수는 없던 것을 말이지.
그것이 "사랑"이라고 작정하고 들면 그렇게 불안하고 유치하고 쓸쓸하고 편집적이고 가엾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을 말이지.....
글쎄.. 그걸 아니었다고 부정하면서 작별을 견딜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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