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1/2007 10:40 am
예수는 서른세 살에 죽었다. 청년 마르크스라는 말은 변별적이지만, 청년 예수라는 말은 공허하다. 예수는 늘 청년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예수의 죽음은 찬란하다. 젊은 죽음이 늘 찬란한 것은 아니지만, 늙은 죽음은 결코 찬란할 수 없다. 프랑코의 죽음, 스탈린의 죽음은 늙음의 연속선 위에 있어서 별다른 뭉클함을 자아내지 못한다. 아, 예가 적절하지 않았다. 프랑코나 스탈린의 이미지는 너무 부정적으로 강렬하다. 그러나 긍정적 인물이라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공자의 죽음이나 석가의 죽음도 늙음의 연속선 위에 있어서 별다른 애수를 자아내지 못한다. 예수의 젊은 죽음은, 그에게나 그의 팬들에게나, 다행이었던 것 같다. 그 죽음은 젊은 만큼 애닯다. 그의 젊은 죽음은 축복이다. 그러나 이 말은 2000년이라는 세월의 두께 때문에 할 수 있는 흰소리다. 그 거리가 좁혀지면 그런 칼은 칼날이 되기 쉽다. 예컨대, 김현의 젊은 죽음은, 그에게나 그의 팬들에게나 다행이었던 것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젊은 예수... 김현...아 그리고 그들과 비견될 것은 아니지만 찬란한 젊은 죽음이라는 말에 있어서 기형도, 그리고 내 가슴에 박힌 그 사람, 황보윤...
p. 231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김현
결국 위에서 말한 이들은 육체적인 한 번의 죽음은 겪었지만 그들 중 몇은 분명히 불멸이 될 것이다.
p. 233
모든 권력은 부패한다. 그리고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적어도 <조선일보>의 지난 20년의 발자취는 그 경구가 괜한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p. 235
실상 북의 정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존재만으로도 <조선일보>의 존립을 떠받쳐주고 있는, 이 신문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다. <조선일보>의 공간을 넓혀주는 조선인민주의인민공화국..... 그러나 어느 날 북조선 정권이 사라진다고 해서 <조선일보>가 따라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때도 전라도는 여전히 있을테니까.
p. 237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란, 어쩌면 일종의 피해의식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 피해의식이 내 눈길을 소수파에게 돌려놓았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소수파의 중심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전라도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내가 전라도의 언저리에 있듯이, 나는 빈민층의 언저리에 있고, 외국인 노동자의 언저리에 있고, 범죄자의 언저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소수파에 대한 나의 동일시는 거짓 동일시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것은 함량 미달의 동일시이다. 나는 소수파의 소수파다. 그것은 내가 모든 집단의 주변부에 있다는 뜻이다.
나는 소수파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사회적 주류의 신분이 아니고, 사회적 주류의 의식도 아니니 나는 소수파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크게 별나거나 경원시될 신분도 또 아니고 그런 의식도 아니니 나는 평범하고 주류기도 하다. 아마도 일종의 정서적 소수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의식의 뿌리는 무엇일까. 전라도 사람이 아니고, (상당히 가깝긴 하지만) 절대적으로 빈곤한 계층도 아니며, 이방인이 아니면서도 그런 계층의 말에 먼저 고개가 기울여지는 것은. 그것은 저런 부류에 정서적으로 더 가까운, 노동자계급의 여성이라는 이중의 소수파 의식 때문 아닐까. 실제적으로 그렇든 아니든, 노동자와 여성은 우리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소수파의 얼굴이다. 아, 이런 생각이 슬프다거나 괴롭다는 것은 아니다. 고종석과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소수파여서 소수파의 정서에 먼저 가슴이 울리는 내 의식이, 굳이 자랑일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p. 275
죄의 현실은 의식보다 앞서 있고, 그 죄의 연대성은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악의 주범은 의지다. 죄는 자연이 아니라 의지다.
p. 335
죄에서 허물로의 이행은 집단 책임에서 개인 책임으로의 이행이다. 허물이라는 새로운 척도와 함께 악은 개인적인 잘못이 되었다. 그 개인화로 말미암아 허물은 죄를 고백하는 '우리'와 단절된다. 죄가 공동체적이라면 허물은 개인적이다. 그래서 이제 잘못한 자와 잘못하지 않은 자를 가릴 수 있게 되었다. 허물에는 등급이 있다. 죄는 있거나 없지만, 허물은 많거나 적다.
죄도, 허물도 많은 나. 집단으로서도 개인으로서도...
p. 337
지적 압도의 느낌은 독자와 저자 사이의 지적 낙차가 크다고 해서 반드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뛰어난 저자의 책도 가장 범상한 독자에게 아무런 인상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지적 압도도 저자와 독자 사이의, 뭐랄까 궁합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절대적으로 동감한다. 그가 예로 든 책이 몇 권 내게도 있는데 그 책들로서는 내 책꽂이에 있다는 것이 정말 운이 나쁘다.훌륭한 눈을 가진이들이 극찬한 책이라 해도 내가 감동하지 않은 책도 있고, 모자란 내게 아주 큰 감동을 준 책이 그들에게종이값이 아까운 책인 것도 태반이니까.
궁합... 이라는 말은 사실은 이런 때는 맞지 않다. 그저 수준이 안 맞아서였겠다.
박상륭의 책들, 그리고 어린 시절 내 테트리스 게임이 되어주었던철학개론서 몇 들. 언젠가는 읽어내리라 다짐을 하면서 먼지옷을 입은 지 십 년, 이십 년이 되어가는 저불쌍한 것들을 어쩌란 말이냐.
p. 346
고종석<개마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