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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규장각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용서해다오.

by 소금눈물 2011. 11. 7.



세손이 되던 날부터였던가.
목숨을 노리던 손길들이 찾아들었던 것이.
그 손길은 세손책봉을 거두어달라는 권신들의 시위였고, 동궁전 마당에 자신도 모르는 병장기를 묻어두고 역모를 토설하라던 고함이었고, 고강의 시제를 거짓으로 알려주던 스승이라 하던 자들이었고, 침전으로 뛰어든 칼날이기도 했으며, 시전의 상인들과 힘을 합하여 불구덩이로 밀어뜨리던 음모였으니.
생각하면 하루도 편히 눈감고 잠들 수가 없던 날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더 고통스럽던 그 수 많은 함정들.

헌데,
마침내 그 목소리들의 얼굴, 칼든 자의 머리를 보고 말았는데
물러서랍니다.
아니라, 그런 일은 없다 하십니다.




무슨 까닭이셨습니까 전하.
아비를 죽이고 이제 소손마저 그 아비의 길로 몰아넣는 저들의 실체를 명명백백히 아시고도 눈을 감고 외면하시는 그 마음이 무엇이십니까.




아니,
전하 마저 이제 저는 의심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얼굴이 마지막으로 서 있는 실체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 뒤에 다시 다른 얼굴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 얼굴이.. 전하셨던 겁니까.





편전에 들어 묵묵히 눈길을 떨어뜨리고 앉은 세손을 보고 전하도 한참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언제나 속이 깊고 진중하던 세손.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미 왕재를 넉넉히 갖추었던 세손.
임금의 명에 언제나 지극히 순명하였고 효성이 깊었으나 언뜻 언뜻 짙은 슬픔의 그림자를 감추지 못하던 손자.
결코 지울 수 없을 그 무거운 그림자를 만든 죄인이 된 전하.
세손의 이 얼굴을 대하기가 참으로 두렵고도 아팠을 것입니다.


왜 내 결정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는 게냐.
그 뜻이 궁금해 온 것이 아니었느냐.

끝내 말을 않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세손에게,  이윽고 전하는 손자의 물음을 대신 합니다.




전하, 어찌하여 그런 하명을 내리셨는지, 어찌 이 모든 참혹한 상황을 그냥 덮어두려 하시는지 소손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례희의 폭발이 실수가 아니라면, 누군가 작정하고 자신을 해치려는 짓이었다면 그가 누구던 기필코 멸하겠노라, 뼈를 발라서라도 감히 국본을 해하려던 자의 목숨을 짓이겨놓겠노라 분노에 떨던 전하가 아니셨습니까.
그런데 모든 것이 밝혀진 지금, 전하께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십니까.
어찌 이 참담한 일을 천한 군기시 서리 하나의 실수로 덮어버리려는 것이옵니까.




미안하구나...




미안하다...

임금의 모든 행위는  무치라 했습니다.
그 하는 일이 부끄러움이 없으니 미안할 일이 없습니다.

헌데 지금 망극하옵게도 자신에게 하는 이 깊은 한숨의 말씀은 무엇인지요.





네게 그런 고초를 겪게 해 미안하다.
그런 고초를 겪게 하고도 또 이렇게 덮을 수 밖에 없어 미안하다.




전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아니다, 너한테는 백 번, 천 번도 더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야.

전하...



내 처음엔 중전을 내치리라 결심했었다.
헌데... 그럴 수가 없더구나...




.....





내가 중전을 처음 본 것이 내 나이 예순 여섯인 십사 년 전이다.
국모의 자리를 비워둘 수 없는 까닭에 그 사람을 중전으로 들을 것을 윤허했었지.


그 어린 중전을 살뜰이 품어주고 아껴주지 못했던 지아비.
나라일에 바빠 외롭게 두었더니, 그 눈먼 권력에 마음이 팔렸던 게다.
살가운 말 한마디를 듣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중전.
국모이기 전에 어리고 애틋한 어린 아내였던 것을...




전하의 회한을 저하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무섭고 냉정하던 전하 역시, 한 지아비로서의 책임과 나랏님으로서의 자리의 무게로 괴로웠던 것임을 생각합니다.




중전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어.
허나, 그런 눈먼 권력이라도 탐하지 않았다면 중전이 그 많은 세월을 어찌 견뎠을까. 
난 자꾸만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더구나.




중전은 더 이상 중전이 아니다.
나는 다시는 중전을 대면하지 않을 것이고, 중전은 평생 한 발자국도 중궁전을 나서지 못할 것이다.
살아도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니니 명줄이 붙어 있는 것을 감사하며 평생 그 곳에서 죽은 듯이 지내라 했다.
숨소리도, 목소리도 내지 말라 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말고 없는 사람이 되라 했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너 또한 그리 해야 할 것이야.
헌데...
그래도 그 목숨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니... 너도 그리해 줄 수는 없겠느냐...
혹 내가 죽은 뒤에라도 네가 그 목숨만은 연명하게 해 줄 수 없겠느냐...





눈물이 맺혀 간절히 바라보는 전하의 눈길을, 저하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인 전하께서, 손자인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백 번, 천 번 용서를 구해야 한다시는 말씀.
그러나 차마 중전을 내칠 수 없으니 그를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저하는 어찌하지 못하였습니다.

성총을 이용하여 용안을 흐리고 세자의 목숨을 앗아간 여인.
그리고 다시 세손을 모함하여 죽이려 했던 여인.

그래도 차마 죽일 수가 없다며 눈물을 보이는, 저 가엾고 늙은 지아비 전하.

허나,
가엾은 지아비의 늦은 정한을 생각하기에는 저하의 상처는 너무나 깊고 무섭습니다.
아직도 그날 달그림자의 한숨이 목을 죄어오는데, 아직도 침소의 어디 쯤에서 칼날이 날아들어올지 모르는데, 그래도 이 모든 원한의 실체를 용서하여 달라는 전하의 말씀을 받들기엔, 저하의 마음이 너무 깊이 베어졌습니다.
어쩌면 전하 조차, 당신의 편이 될 수 없음을, 영영 그렇게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서로 다른 눈물에 젖어든 채, 두 사람은 오래 말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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