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는,
참으로 멀리서부터 밤비는
왔구나
낙숫물에 깎이는
섬돌귀는
이 비와 같이 다니느라
뭉툭하게 닳아졌고
나는 새로 선 비석처럼 귀를 세우고
아득한
비의 여정을 엿듣는다
이 시간
오동잎 뒤에 세워둔
푸른 잠은 깊어지고
(푸르다니!)
푸른 잠이
너울대며 가는 길도
밤비의 걸음을 닮았다
그렇지, 밤에 후득이는
오동잎이
우리 生이지
후득여도 너울대는 게
그게 生이야
소주 생각 간절한 밤비 속
우리 生이야
(이하 줄임 -)
새벽에 일어나서 어제 <이산>을 보다가 잡힌 <기린>에 대한 자료를 찾으라 책꽂이를 뒤졌다.
중국신화나 우리문화 이야기 어디쯤에 나올 법도 한데, 영물 중에서 유일하게 기린만 보이지 않는다. 어디서 보았더라...분명히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책꽂이를 뒤지다 갈 데 못 찾는 손길이 엉뚱하게 이 시집을 넘기고 있었다.
밤비는, 멀리서부터 왔구나 밤비는-
타박타박, 혹은 속곳 젖는 줄 모르게 잦아들며 - 그렇게 밤비의 길을 더듬으며 나는 <기린>을 잊었다.
섬돌귀를 깎고, 내 귀를 새로 세운 비석으로 만들고 그 아득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밤비.
비오는 밤이면 뒤척이며 빗방울을 헤는 내가 거기에 있다.
아득한 빗소리를 귀에 걸어두고 잠이 드는 내가 거기에 있다.
그 비에 흥건히 젖어들던 얇은 내 잠.
후득이는 밤비, 물에 떠 있는 그 잠들.
소주도 없이, <밤비>에 취해 창이 밝아온다.
미농지 같은 하늘이, 선듯한 가을 아침이 시리다고 어깨를 떨고 있다
제목: 젖은 눈
지은이 : 장석남
펴낸 곳: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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