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쳐놓고 한 줄도 올리지 못하고 먹먹하게 한참을 앉아있다.
안개낀 천변풍경을, 기우뚱한 자세로 보고 있던 음울한 얼굴의 청년이 보인다.
더벅머리에 우는 듯, 웃는 듯 종잡을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던 그.
봄바람이라기에도 무엇한, 쌀쌀한 아침바람속을, 그는 훌쩍 일어서듯이 떠나버렸다.
스물 아홉의 생일을 며칠 넘긴 이른 봄이었다.
짧디 짧은 한 생애를, 그는 참말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의 첫 시집은 유고시집이었고, 따라서 마지막 시집이었다.
단 한권의 시집으로 이후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제 방 하나를 오롯하게 차지한 별이 되었다.
80-90년대를 문학의 열병을 치른 젊은이 치고 기형도의 병을 앓아보지 않은 자가 몇이나 될까. 겁에질려 도망치는 이 음울한 시에 가슴을 앓아보지 않은 자 또 몇이나 되랴.
나 역시, 어줍잖은 열정에 어지간히 밤을 새웠던 그 날들에 가장 크게 이 이름을 써놓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빈집은 내 집이었고, 그가 더듬거리며 문을 잠근 그 곳에, 내 방도 그렇게 잠겨있었다.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찾아갔던 한여름 망월동, 이한열의 어머니를 만났다던 그 곳에 나도 그의 시집을 들고 그들의 흔적을 좇으며 그 곳에 갔었다.
기형도를... 무엇이라 말할 지 모르겠다. 그로테스크리얼리즘이라는, 그야말로 더는 어찌 말할 수 없는 낙인을 김현이 찍은 후로 다른 무엇으로 기형도를 이름할 지 모르겠다.
- 기형도는 기형도다. 그가 어떤 선배시인으로부터 이 핏줄을 내려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형도는 기형도다. 다른 표현을 모르겠다.
이 책은 <오늘의 한국작가> 시리즈로 나온 책이다.
그의 미발표시 열 여섯편과 그를 기리는 시인들의 작품, 소설들 그리고 산문이 실려있다.
그를 사랑하고 기억하는 이들의 아프고 그리운 부름이다.
그 부름에, 작은 내 목소리도 얹어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한 때의 그 사랑에 절름거리며 행복한 시절, 내게도 있었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나와 함께 지새던 어리석은 욕망들, 부질없는 한숨들아
잘 있거라.
그 문 앞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네
잘 있거라, 하염없이 그리운 그 낡은 한숨들아...
제목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펴낸 곳 :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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