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낱 어느 시간 바깥의 일이었으니 잊어주길 바라네
몇십년 만에 찾아온 보름 동안의 봄이었기에 그 햇살을
쓰고, 기워놓은 늑대 가죽을 깔고 이를 잡느라 사람들은
끼니조차 잊었다네 그 보름을 우리들은 얼음 미치는 날
들이라 부르기로 했다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하여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답답할 일 없고 가슴 열리는 일
이 뭔지 몰라 무심히 쪼그라들었던 심장들 날것들, 불씨
들 침묵이 침묵을 두드리는 순간과 간혹 침묵이 침묵의
옆구리로 숨어드는 순간만이 있을 뿐 그것이 우리가 겪
은 일의 전부였네
그후 얼음 미치는 날들 다시 보지 못하고 멸족한 우리
를 단지 더 추운 곳으로 옮겨갔다고만 적길 바라네 그날
이후로 산 것은 아무도 무엇도 지나간 적 없었다고만 일
러주길 바라네 잠시간 태양이 비쳐도 적막 위로 눈만 활
활 쌓이고 쌓일 뿐 얼음의 파편들 짐승의 이름들 찾지
않길 바라네 이것이 천년을 넘긴 일이므로 잊어주길 바
라네
- <잠시>
비스듬히, 천천히, 느릿느릿, 아슴하다, 허우룩하다,
묵묵히, 바라다보다, 내려앉다, 뒷걸음질치다,
요즘 내가 부쩍 골똘히 바라보고 있는 낱말들이다.
이런 형용사와 동사들은 색깔이 강하지 않다.
느리고 둔탁한 통증의 색깔들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이런 말들이 생각났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적막하고 무심한 어떤 시간.
그때 날것으로 쪼아대는 얼음이 미치는 때가 온다.
이윽고 사라지고...
필연적으로 그런 것들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이 사람은 그것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이므로-
이후 오래 추운 계절이 된다.
천년 후에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그 시간들.
얼음같은 침묵을 입에 물게 된 짐승이 된다.
가슴이 시리다.
얼음의 파편들이 박혀버렸다.
제목 : 바람의 사생활
지은이 : 이병률
펴낸 곳: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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