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젹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사평역(沙平驛)에서 >
어떤 때는 예의처럼, 혹은 의식처럼 어떤 글을 읽거나 혹은 기억해주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내게 있는지 모르겠다.
신문사마다의 신춘문예가 마감될 이때 즈음 잊지 않고 기억이 나는 시다.
중앙일보 당선시였던가.
지금 읽어도 너무나 아름답고 선연하다.
겨울눈 씨앗이 이미지마다 오롯하게 살아나는 우리말의 이 아름다움, 바탕에 깔린 이 쓸쓸하고 따뜻한 밤의 모습...
설국(책읽기 설국 클릭 ;;) 의 정경이 저러했을까, 그 정서가 저러했을까..
불러온 시어들이 손바닥에 떨어진 눈송이처럼 녹아버릴까 함부로 쥐지 못하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의 시어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튼튼하다. 아름다움이 지나쳐 선연한 이미지로만 흘러버리는게 아닐까 싶다가도 튼튼한 이 결기의 밑둥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
재능없는 열정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열정없는 재능은 얼마나 값싼 것인가.
이 계절은 참 혹독하다.
제목 : 사평역에서
지은이: 곽재구
펴낸곳: 창작과 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