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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돌말사람들

생인손 - 마지막회

by 소금눈물 2011. 11. 21.

08/07/2004 08:26 pm공개조회수 0 5




벌써 잠이 들었는지 안방쪽은 불이 꺼져 있었다.

승구는 마당에 펼쳐놓은 평상에 벌렁 드러누워버렸다.
반쯤 뜬 눈에 쏟아질 듯 눈부신 별밭이 보였고, 거묵이인가 컹컹 짓는 소리도 아련했다.
한정없이 온 몸을 짓누르는 취기를 어쩌지 못하며 승구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나 했는데 뒷머리를 가만히 들어 목 밑에 배개를 바치는 손길에 흐릿하게 깨었다.
평상마루에 올라온 한 쪽 신발을 내려놓으며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아가... 찬디서 잠들먼 고뿔든다. 배탈나믄 어쩔라구 이불두 안 덮구 이랴...."

열 다섯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손길이었다.
꿈 중에도 승구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모기가 물까봐, 종이부채로 가만가만 저어주는 바람을 느끼며 땀냄새가 올라오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고 싶었다.

"많이 고단혔구나. 하루종일 솜띵이를 밀구 다니구 저녁도 못 먹구 잠들었네. 내 새끼...
니가 월급 타서 부친 한수대(와이셔츠)를 입지두 않구 아부지는 만져만 본다.
학교 보내달라구 우는 니 종아리럴 부지깽이에 싸릿대 모냥으로 만들어놓구, 엄니가 잠이 왔겄냐....
내 새끼... 반공일날이믄, 껌정치마에 리봉을 단 교복을 입구 니 친구들이 새새거리먼서 지나가먼 못난 에미 가슴을 독짝(돌멩이)으루 찍었다.

아가... 별 보구 나가서 별 보구 들어온다는디... 한겨울이 자칫방이 물그릇이 얼음통이 된다는디, 그 독헌 서울것덜은 새끼두 읎구 부모두 읎나. 솜털두 안 벗어진 애기가 먼 힘이 있을 거라구 피땀을 다 뽑는다냐.
에미두 눈두 있구 귓구멍도 있다. 니가 말 안 혀두 짐작이 간다. 실읎는 이예기 책만 좋아헌다구 작대기바람두 어지간히 혔더니, 그 작대기가 시방 엄니 등짝얼 친다.

어뜨케 벌은 우리 새끼 피 같은 돈얼, 부모헌티 부치구, 따순 방이서 잠이나 자나...어린 것이 곯지 않구 먹기넌 헐렁가....
그 돈얼 니 동생 수업료루 내고 오먼서 피눈물이 났다.... 못난 에미가 자식 몸띵이 고랑을 파먼서 뜯어먹구 에미는 밥얼 못 넘겼다..."

가만가만 부채질을 하며 웅얼웅얼하는 말끝이 천천히 젖어들었다.
승구는 그때쯤에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맛전에 흐르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주며 볼이며 손이며를 쓰다듬는 장모의 손길에, 승구는 기척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바위같은 사위의 손을, 비단천을 쓰다듬듯 가만가만 어루만지던 장모가 스르르 일어나 평상을 내려갔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천천히 들리고, 마당 끝 방이 열렸다 닫히는 문소리가 났다.

승구는 자신도 모르게 솟은 눈물을 크윽 삼켰다.
고뿔 들먼 어쩔라구 그랴...배탈 나믄 어쩔라구 그랴 내 새끼...
그 말이 두려워 승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안방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부시럭대고 배게를 찾아 눕는 승구옆에서,

"먹자구 들먼 백마강 물을 몽땅 쳐넣어두 션찮을 건 불나는 내 속인디, 하는 일이 머 있다구 초저녁부터 이랴."

인기척에 깨인 아내의 말에 반쯤 잠기가 걸렸다.

대답도 없이 돌아눕는데, 이어지는 말.

"근데 여보, 오늘 보니 우리 엄니 손꾸락이 생인손이여. 언제 그릏게 독허게 앓었나 왼짝 손 중지끝이 문드러져서 아주 읎어. 그게 그릏게 아프다는디 약두 읎이 울엄니 어띃게 버텼나 몰라."

"당신이 속쎅여서 그릏지 머."

끄응 소리를 내며 툭 던지고 배게를 고쳐 배는데,

"허긴, 내 속이 이런디, 금쪽같언 아들 뒷바라지 허느라 그렇키 구박만 헌 못난 딸네미집이 와서 얹혀사는 그 속이넌 어떨까나. 정신 갖구 있으먼 더 못젼딜 일이겄지. 또 몰르지 머. 이것두 니년 팔자다 헐지."

"내가 봉게 당신이나 당신 엄니나 똑같어. 그 속이서 나온 그 자식이 딱이여."

"어디 가겄나. 내 말뽄새가 다 누구헌티 받은 건디. 아하...니얄은 녹두즘 사다가 죽을 끓여보까. 노인네가 밥 한 술얼 지대루 못 삼키니... 날이 더워서 입맛이 읎나... 아무튼 끝까지 고생시키는건....."

말끝을 잇지 못하고 잠으로 떨어지는 아내를 등 뒤로 하고 승구도 눈을 감았다.
등허리를 가만가만 토닥이던 주름진 손길이 자꾸 떠올라 감겼다.

불도 없는 방에 달빛이 부옇게 차올라, 또각거리는 벽시계 추가 중심을 잃고 자꾸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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