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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완결소설- 늦은 비

25.

by 소금눈물 2011. 11. 10.

12/24/2003 09:32 am공개조회수 0 1



무슨 혼곤한 잠이 그리 깊었던가.

사정없이 비가 퍼붓는 갈대밭이었다. 창은 빗속에서 영을 바라보고 있었다.단단하게 가슴께를 묶은 웃옷을 입고 영은 처연하게 되돌아 서 있었다.
돌아 서 있는 영은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젖은 머리가 등허리에 달라붙고 어디 먼길을 걸어 왔던가. 영의 발밑에는 핏물이 고여 비와 함께 흘렀다.

영아...
창은 힘겹게 부르지만, 부르는 소리는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했다. 꿈결에도 가슴이 아파왔다. 핏물이 고인 영의 벗은 발이 창의 눈속에 가시처럼 박혔다.
아팠다. 그녀의 발. 진흙이 묻고 피가 배인 발. 어쩌자고 저리 맨발인가. 어느 길을 빗속에 허위허위 달려와서 내 앞에 서 있는가.

네가 누구이더냐.
너는 무슨 이름을 가진 꽃이기에 이토록 아프게 피어 나를 울리느냐.
네가 어떤 모진 바람을 뚫고 내게로 온 것이더냐.네가 온 길에 내가 어찌 서 있었더냐.
영아, 아픈 내 누이야.
그 아픈 이름이 이제는 사금파리로 변해 나를 찌르는 아이야.
네가 지금 들이는 꽃물이 어떤 모양이더냐.
하늘에 계신 어떤 이가 가장 어여쁘고 애처로운 작은 별을 잠시 세상으로 내어 내게 보인 것이냐. 그에게 가 나는 물어보리라. 그가 하늘에 무슨 죄를 얻어 내게로 왔던가. 그에게 내린 잔이 어찌 이리도 쓴가. 돌아서 있는 어깨가 어찌 그리도 처연한가.

창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누구이냐.
나는....네게 무엇이더냐.

영은 돌아선 채 말이 없었다.

피에 젖은 네 발을 보고 가슴뼈가 먼저 바스라지는 나는 누구이더냐. 네가 젖어 있는 모습으로도 먼저 가슴이 무너지는 나는, 나는 누구이더냐.
내가 오라비였더냐. 네가 부른 물길이 이렇게 사정없이 내 안으로 밀려들어 흔들리는데, 몸이 젖기도 전에 혼이 먼저 네게 손을 뻗어버린, 나는 누구더란 말이냐.

영은 끝끝내 말이 없었다.

비는 어쩌자고 갈대밭을 온통 다 적시고 마침내는 두 사람을 넘어뜨릴 작정이었다.
퍼붓는 빗속에서 창은 열에 뜬 사내일 뿐이고, 영은 슬픔에 겨운 여인의 뒷모습일 뿐이었다.

어지러운 꿈이었던가.
가뭇없는 어둠이었던가.
휘젓는 팔에 부드러운 무엇이 잡혔다.

"오빠...."

힘겹게 눈을 떴다.
부신 전등불에 눈이 아팠다. 그새 밤이었다.
창은 다시 눈을 감았다.

"정신이 들었구나. 이젠 되었다. 아직 한참은 움직이기 어려울 것이니 일으키지 말거라. 영이가 오늘은 오빠를 좀 지켜줘야겠다."
나즉한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가슴께가 찌르는 듯이 아파왔다.
"오빠....죽는 줄 알았어. 다시 오빠를..."

말을 잊지 못하고 흐느끼는 영의 눈물이 창의 얼굴로 떨어졌다.

창이 눈을 떴다. 눈물에 번진 영의 얼굴이 불빛 속에서 아프게 다가왔다.

"오빠가, 없다면 나도 사는게 아니야. 오빠가 아니면....나는 살 수가 없어...."

눈을 감는 창의 얼굴에 영이 자신의 얼굴을 맞대었다. 눈물이 흘러서 창의 눈가까지 젖어들었다.
목이 아팠다.
괜찮다. 괜찮다 영아 울지 말아라...영이를 달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창은 손을 뻗어 영의 얼굴을 안았다.
가슴에 기대고 흐느끼던 영이....차츰..잦아들더니 이윽고...고개를 들었다.
창은...볼에 다가오는 아릿한 온기를 느꼈다.
천천히 내려오던 영의 입술이 창의 입술에 닿았다.
사람의 몸 어느 부분에 이토록 부드럽고 연약한 살결이 있었던가.눈물에 젖어든 입술은 그대로 창의 것에 내려앉았다.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어떤 꽃잎이 자신의 입술로 조용히 날아 내린 것 같았다.
창은 눈을 감았다.

꿈이던가...꿈이었던가.어느 아득한 꿈에서 내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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