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낮에 사원을 그렇게 많이 돌아다녀서인지, 저녁 무렵에 들른 오래된 호수는 너무 지쳐서 별달리 사진도 찍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만들었다는 어마어마한 호수, 그런 걸 보면 거기에 동원된 사람들의 비참한 운명을 먼저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인지 감동보다는 역시나 좀 우울해지기도 하고.
무섭게 따라붙는 관광지의 아이들, 유별나게 거기가 더 심했다.
한국인 자원봉사자들에게서 배웠다는 곰 세마리 노래나, 오 필승 코리아. 정말 지겹게 들었다. 여닐곱 명이 한꺼번에 따라다니며 아무리 쫓아도 막무가내로 각다귀처럼 붙어서 사라고 졸라대며 먹는 자리까지 서슴없이 올라와 무릎팍을 밀어대니 정말 너무 힘이 들었다. 일행들 모두가 짜증이 나서 도저히 뭘 먹지를 못하고 산 과일들을 포기하고 일어서야 했다.
캄보디아에 내려서 처음 느꼈던 어린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슬픔은 어느새 이렇게 피곤하고 지친 짜증으로 변해버린다. 아이들아.. 너무 지나치다. 너무 하다 정말...
저녁식사는 캄보디아 전통음식 수끼였다.
샤브샤브 비슷하기도 하고 그보다는 훨씬 담백한 요리다.
야채와 해물이 들어간 커다란 솥에 끓인 탕..이라고 할까.

살짝 익힌 건더기를 먼저 건져먹고 남은 국물에 밥을 비벼 먹는다.
반찬은 보시다시피- 없다 ㅡ.ㅡ;;
담백해서 시원하긴 했지만 사실 별로 맛은 없고 좀 밍밍했다.
하지만 내가 언제 캄보디아 음식을 먹어보겠나 싶어 열심히 먹었다.
여행지에서 음식 안 가리는 건 복이다.

야시장을 돌아보았다.
소박하지만 손으로 직접 짠 직물이며 작은 장신구들이 있었다.
캄보디아는 뽕나무가 아주 많아서 옛날부터 비단이 유명하단다. 침대 시트 같은 것도 가격이 쌌는데 사실 실크 재질의 시트를 어떻게 감당할까 싶기도 하고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아니어서 눈구경만 하고 다녔다.
기념삼아 무얼 사볼까 열심히 찾아보았는데 가게마다 거의 똑같은 상품들이다.
감탄했던 것은 너무나 열심이었던 캄보디아 상인의 모습들.
하나라도 더 팔려고 열성적이었고, 계산을 하면서, 이것이 한국말로 무엇이냐, 숫자 하나부터 열 까지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당장 지금 하나를 파는 게 아니라 다음에 올 한국 고객을 위해서 준비하고 공부하려는 모습, 여나믄살 앳되보이는 어린 소녀부터 나이 지긋한 여주인들까지 하나같이 그랬다.
캄보디아가 일어선다면 정말 여성들의 힘이겠다.

일정이 거의 끝나간다.
내일 톤레삽 호수만 들르면 아마도 공식적인 일정은 끝나겠지.
씨엠립의 밤을 우리도 즐겨보자고 시내로 나갔다.
여긴 유럽거리란다.
외국인여행자들이 많이 들르는 노천까페가 있는 곳이다. 여긴 그나마 늦도록 네온간판도 있고 불빛도 있어서 조금 번화해보였다.

가로등도 꺼지는 다른 곳과는 별천지로 보인다.
이런 작은 상점의 불빛도 반가워지다니.
어느새 나도 캄보디아에 조금씩 익숙해졌나보다.

야외 포장마차에서 씨엠립의 밤을 즐기고 있는 외국인들.
가랑비가 내리는 속에서도 모두 느긋하고 평화로와보인다.
일상을 잊고 이 소박한 거리에서 행복해져있다.

우산을 쓰고 어정거리다 길거리 음식에 눈이 갔다.
물어보니 로띠 마따바라는 음식이란다.

저렇게 얇은 반죽을 넓게 펴고
작은 바나나를 하나 잘라 계란과 함께, 익어가는 반죽 중간에 넣는다.

여기에 연유를 넣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착착 접어서 완성!
마아가린, 계란, 연유, 설탕, 바나나. 그리고 무슨 반죽-
재료는 아주 간단한데 지켜보자니 칼로리가 장난 아닐 듯 하다.
그래도 너무 맛있어보여 샀다. (사실은 언니네가 사고 나는 얻어먹게 되었다 ^^;)

그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까페 레드 피아노.
툼 레이더를 촬영할 당시, 안젤리나 졸리가 이 까페에 들렀단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엄청나게 유명해져서 발 디딜 틈이 없단다.
그걸 갈까 아니면 사실은 그 옆집보다 분위기가 좋은 인터치로 갈까 하다가 우린 뭐 졸리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는데~ 하며 우르르 인터치로 몰려갔다.

테라스를 마주하고 길 양 쪽에 있는 요 집.

높은 천정에 걸린 종이등이 인상적이다.
불빛이 참 예뻤다.

크메르 루주 이전부터 있었던 곳이란다.
<그린 파파이야 향기>에서 보았던 것 같은, 백 년은 된 듯한 낡은 선풍기가 천정에 매달려 천천히 돌아가고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오던 인 터치.
아 지금 생각하니 너무 그립다.

앙코르 비어를 시켜놓고 아까 산 로띠 마따바를 펼쳐놓았다.
로띠 마따바는 정말 맛있었다. 굉장히 달았지만 아주 인기가 좋았다.
더운 밤의 앙코르 맥주도 아주 좋았고.
술을 잘 못하면서도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이제서 조금 정이 들 것 같은데...
힘들게 올라갔던 오래된 사원의 계단들, 엄청난 감동과 흥분을 불러일으키던 그 사원들의 추억이 술잔 아래 따라온다.
가난하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캄보디아.
떠나고 싶지 않아진다. 한 달만, 아니 보름만 더 머물고 싶다.
하지만 늘 여행의 끝은 이렇게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접혀지는 것이지.
지금까지 갔던 어떤 여행지보다 마음 깊이 남은 캄보디아. 정말 오래도록 그리울 것이다.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은 나라지만 그 부족함을 절대 느끼지 못했다.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 맛있는 먹거리들, 놀라운 문화유산과 그것을 지킬 힘이 없는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슬픔...
오래도록 정말로 나는 캄보디아를 그리워할 것이다.
씨엠립의 밤이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