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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2)

by 소금눈물 2011. 11. 7.

04/28/2009 02:1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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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강자가 약자의 원한을 감소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이다. 원한의 통제는 원한의 대상에게 복수하려는 사람과 격리시키고, 복수 대신 평화와 질서에 순응하도록 그들을 유도하거나 타협하도록 강요하거나, 손실에 상응하는 등가물을 규정함으로써 완성된다.

죄와 의무라는 개념을 도덕화하여 이것을 양심의 가책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채권과 채무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과정을 왜곡시켜버렸다. 이로써 부채를 상환하려는 전망은 사라져버렸다.

양심의 가책은 채무자에게 부채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봉쇄했을 뿐 아니라 이로부터 속죄도 보상도 불가능하게 된 '영원한 벌' 내려진 것이다. 이 사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채권자까지도 그 그물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리하여 저주에 사로잡힌 인류의 시초(아담, 원죄, 의지의 부자유)까지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게 했다. 이로써 인류는 고통받는 인간이 일시적으로 위안을 찾는, 역설적이고도 무서운 책략인 그리스도교의 천재적인 장난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신 스스로가 인간의 죄 때문에 희생하고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바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니체전집 14 p.441)

모든 민족은 고유의 신을 숭배하고 있다. 각 민족은 민족의 신앙으로 그들을 고취시킨 조건, 즉 그들의 덕을 숭배한다. 신에게 반자연적인 거세(去勢)를 가해 선한 신으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힘에의 의지가 쇠퇴하는 곳에서는 생리적인 퇴행, 즉 데카당스가 나타난다. 그리스도교적인 신의 개념- 병자의 신, 독거미로서의 신, 정신으로서의 신-은 지상에서도 가장 부패한 신의 개념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정복된 자와 압박받는 자의 본능이 전면에 나타난다.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을 찾는 자들은 최하층민들이며, 이 종교에서는 죄에 대한 궤변, 자기 비판, 양심의 심문이 권태로부터 벗어나는 수단으로서 이용된다.

구세주의 삶은 '복음'의 실천에 있었다. 구세주는 신과 교류하기 위해 어떤 공식도 어떤 의식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는 기도도, 유대적인 회개의 설교도, 심판도 하지 않았다. '신의 나라'는 사람들이 기거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어제도 내일도 없으며, 천년이 되어도 오지 않는 곳이다. 신의 나라는 마음속의 특정한 경험일 뿐이다. 그리스도교라는 말 자체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본에 있어서는 오직 한 사람의 그리스도교인 만이 존재했고 '복음'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다. 그 순간부터 '복음'도 유일한 그리스도교인이 체험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것이 되어 버렸다. 죄지은 자의 죄를 위해 죄 없는 자가 희생하는 일, 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이교주의인가. 그리스도야말로 '죄'의 개념 그 자체를 없애버린 존재였다.

(니체전집 15. p. 231-302)




천형균 지음. <정보와 사람>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