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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나는 이야기

2. 친구

by 소금눈물 2020. 10. 7.

 

 

가진 것도, 자랑할 것도 별로 없던 유년의 내게 아마도 남보다 조금 더 주어진 것이라면 역시 책이었을 것이다. 우리 마을엔 내 또래도 없었고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친구라고는 책뿐이었다. 그 시절, 시골의 가난한 집에서는 아이들이 읽을 만한 책이 그리 많을 리가 없지만 문자로 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그 맹렬한 욕망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처럼 내 목을 졸랐다. 글자를 깨치고 교과서를 맨 먼저 읽어버렸고 (얼마나 읽고 또 읽었던지 아직도 초등학교 몇 학년까지의 국어책은 문장 그대로가 떠오른다, ‘햇볕 따뜻한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노랑병아리 한 마리가 농장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식의.), 그 다음에는 다섯 살 위의 오빠 교과서를 읽었고, 그 다음에는 집안에 굴러다니는 농민신문과 월간 새농민을 읽고, 오빠들이 몰래 돌려 읽던 빨간 표지의 책도 6, 8권까지 다 섭렵했다 (오빠 미안해. 오빠보다 더 먼저 읽었어, 그 세로줄로 되어있던 책들, 운기조식을 하고 내공을 키우려면 반드시 엄청난 미녀들과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어쩌고를 해야 했던 그 책들 말야). 더 읽을 것이 없으면 기드온 협회에서 연말에 나눠줬을 파란색 표지 신약성서도 알뜰하게 읽었고 오빠의 국어사전도 먹어치웠다.

가난했지만 유별나게 책을 좋아했던 분위기 덕분에 언니들이 시리즈로 들여놓았던 한국단편문학전집 덕을, 아마도 내가 열심히 보지 않았을까. 나중에 소설공부를 한답시고 돌아다닐 때 끝까지 못 고치면서 눈총을 먹은 의고체의 말투들이 초등학교 이삼학년 때 읽은 그 책들에서 받은 것이었다. 책은 내 친구였다.

 

올림푸스 열두 신들의 무용담에 넋을 놓고 톰 소여를 따라 하고 싶어서 학교 앞 언덕 공동묘지에 약속편지를 던져 넣던 어린 나는 분명히 많이 모나고 울퉁불퉁한 아이였다. 조숙한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기를 어려워했고 내 책속의 친구들만큼 그들은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는 이상하고, 되바라지고, 잘난척하는 그런 아이였을 것이다.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을 이야기하고, 대장 부리바의 자식들을 함께 한탄해주던 이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는 내게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조용한 산길에서 살짝 들어간 숲, 평장의 애무덤에 내려쪼이던 그 늦가을 날들을 생각한다. 그 뒤로 나는 오래 사람들에게서 마음을 여는 법을 알지 못했다.

 

이후로 다른 많은 친구들을 만나기는 하였다.

연극에 빠져서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다니며 공연을 봤고, 소극장도 많이 돌아다녔다.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운명의 고통에 목이 졸리는 이야기들이었다.

레퀴엠을 시작으로 바로크 음악, 특히나 현악에 홈빡 넋을 놓고 많지도 않은 월급을 음반 모으기로 탕진하고 음악회도 열심히 다녔다.

가장 오래 좋아한 것은 역시 그림이었다. 외롭고 쓸쓸하고 마음을 눌러 안고 살던 어린 나는 영 자라지 못한 채였지만 다정히 말을 걸어주는 화폭 속의 이야기가 좋았다. 여덟 살의, 열 다섯 살의, 쉰둘의 나는 내가 평생 써 보고 싶었으나 한 편도 제대로 써 보지 못한 그 이야기들을 가만가만히 얹어준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내 펜으로는 나오지 않았으나 내 마음에 물들어와.

 

친구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살아가다보면 빗속을 혼자 걸어가는 외로움도, 적막한 어둠 속의 바람도 만난다. 그런 마음을 위로해준다면 무엇이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언제나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이 친구기도 하고, 남모르는 속을 담아주는 일기장일수도 있고,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물려준 만년필이나 이미 낡아버린 지 오래인 생일선물일 수도 있다. 마음을 위로받고 살아가는데 힘이 된다면 그것이 생물이던 무생물이던, 혹은 눈에 보이지 않은 무엇도 내 벗이 될 수 있다.

 

지금은,

근원 김용준의 그 담담하고도 고졸한 문장들 속의 벗은 내가 꿈꾸는 벗의 모양이었으나 나는 그리는 못될 것이고, 놓지 못하는 어지러운 꿈들 사이에서 그저 멍하니 새벽을 더듬어 보는 깨져버린 문장들이 어쩌면 지금의 친구인지 모르겠다.

 

... 오래 남지 않은 이 여정에서, 나는 영 아니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끝끝내 영 놓지도 못하는...

 

 

*그림 전기(田琦, 1825~1854)'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