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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소금눈물의 그림편지

<폴뤼메스토르의 눈을 빼버리는 헤카베>- 크레스피 귀세페 마리아

by 소금눈물 2015. 4. 9.

 

 

 

<얼음꽃>이 중단된 지도 벌써 몇 년이나 되는데 어쩌자고 그림편지에 빠져서 이러는지 -_-;

이왕 연재로 그림이야기를 쓰게 되었으니 스스로에게도 어느 정도 긴장을 주기 위해 주제를 가지고 써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주일 정도로 잡고 당분간은 한 가지 주제로 삼아서 그림편지를 올려볼게요. 소재가 부족하다 싶으면 텀이 줄어들 수도 있어요.

 

 

그 첫번째 주제로 <어머니>입니다.

 

건장한 장년의 남자에게 달려드는 여자의 얼굴을 보이지 않지만 움직임의 크기로 보아 몹시 분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얼마나 그녀가 흥분했는지, 얼마나 거친 발걸음으로 뛰어왔는지 알겠습니다. 남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잡고 있는 젊은 여인의 얼굴은 슬픔에 가득 차 있습니다. 빛의 하이라이트는 덮치는 여인의 어깨에서 부터 엉덩이까지 크게 휘어지는 곡선과 ㄱ자로 꺾이는 남자의 다리에서 빛납니다. 빛이 머무는 몸은 운동성을 더욱 강조하여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휘청이는 남자의 자세에 관람자들이 불안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유도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카베(영어이름은 헤쿠바)입니다.

남편인 프리아모스대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헤카베의 열 아홉 자식들은 하나같이 비극의 주인공들입니다.  트로이의 영웅이자 가장 빛나던 왕자 헥토르, 메넬라오스에 의해 사지가 잘려죽은 데이포보스, 트로이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파리스, 헬리노스,폴뤼도로스 등등의 아들들과 불신의 예언자 카산드라, 죽은 아킬레스의 산 제물로 바쳐지는 폴뤽세나 등의 딸이 유명합니다.

 

지금 이 장면은 트로이가 멸망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희망을 걸었던)던 폴뤼도로스의 시신을 확인하고 절망한 헤카베가  폴뤼메스토르에게 달려들어 눈을 빼버리는 모습입니다.

 

명분이 있는 전쟁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요. 몇 사람 정치가나 권력가들의 시샘과 자기현시욕이 만든 죽음의 판에서 산을 만드는 시신의 주인들은 실상은 아무 힘도 없이 끌려온 불쌍한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마주한 "적"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미움도 없이 그저 권력가들의 자존심의 소모품으로 쓰여질 뿐인 것입니다. 전쟁의 참화 아래서 비극을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은 또한 신분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트로이를 잿더미로 만든 이 전쟁의 원인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올림포스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명하다고 소문난 세 여신이, 철없는 양치기소년 파리스의 사과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서 시작되었으니까요.


많은 신화 속의 슬픈 어머니가 수도 없이 등장했으나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카베와 필적할 비극은 없습니다.

잘못 둔 둘째 아들 파리스로 인해 나라는 전화에 휩싸이고 늙은 남편 프리아모스와 자신의 눈 앞에서, 온 트로이의 맹장이었으며 또 트로이의 희망이었던 헥토르가 아킬레스에게 살해되어 전차에 끌려 트로이 성곽을 돌게 됩니다.
트로이의 비극을 예언했으나 사랑을 거절당한데 대해 앙심을 품은 아폴론의 저주로 아무도 그 신탁을 믿지 않는 무녀, 딸 카산드라도 역시 능욕당한 채 살해됩니다.
왕 프리아모스와 왕자 파리스의 죽음으로 패망왕국의 노예가 되어 끌려가던 헤카베는 다시 아킬레스의 유령의 요구로 마지막 남은 딸 폴뤽세나의 죽음을 보아야 했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그녀의 비극은 다하지 않았으니 단 하나 남은 막내왕자 폴뤼도로스. 전쟁의 와중에 이 어린 왕자는 이웃 트라키아로 피신을 보내졌습니다. 트라키아왕 폴뤼메스토르가 프리아모스왕의 절친이었으니 벗의 어린 아들을 지켜주리라 믿었지요.  그러나, 폴뤼도로스는 탐욕스런 트라키아왕 폴뤼메스토르에 의해 참살당했습니다. 헤카베의 시녀들은 잔인하게 해변에 밀려온  토막난 시신을  발견하고 소식을 듣고 한 달음에 달려간 헤카베는 어린 아들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그녀는 폴뤼도로스의 시체를 확인하자 자신의 천막으로 두 손으로  폴뤼메스토르를 유인하여  눈을 뽑아버리고 슬픔에 못이겨 통곡을 하다 개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까지 참혹한 운명이 있었던가요. 해변을 떠도는 늙은 개의 울음소리가 밤 하늘을 울릴 때, 올림포스의 신들도 고개를 돌리고 슬퍼했다고 합니다. 어떤 왕조건 그 마지막 왕의 비극이야 달리 어찌 말하랴마는 멸망과 동시에 죽음을 맞은 프리아모스는 차라리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잃었지만 영웅으로 대접받고 하늘의 자리까지 약속받은  아킬레스의 어미 여신 테티스는 명예를 얻었지만, 일개 인간이어서, 영웅도 되지 못하는 약한 여인의 몸이라서 품안의 자식들을 모두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척살당하고 개가 되어 떠돈 이 여인의 한에는 신들조차 가슴아파했다고 합니다.

가엾어라 불행한 여인이여.

비극의 어머니 헤카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