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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돌말사람들

카스테라 -1

by 소금눈물 2014. 2. 13.

 

 

서울행 KTX가 역내로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호봉이 시계를 들여다본다. 기다리는 열차가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검은색 니트 가디건 아래로 흰 손목이 가늘다.

 

삼십 년 만인가? 우리가 이런 말을 할 만큼 나이를 먹었다는 게 참 실감이 안 나. 넌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찻잔을 내려놓으며 호봉이 웃었다.

 

삼십년 전에도 우리가 이렇게 쭈글쭈글한 아줌마 얼굴이었다는 말이지?”

 

내 말에 호봉이 웃었다.

우리가 지나온 세월이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순간 아득해진다.

나는 변한게 없다고 호봉이 그랬지만, 호봉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냥 스쳐갈 뻔 했다. 방학이 끝나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를 배웅하러 나온 역이었다. 아이를 보내놓고 돌아서는데 짙은 회색 원피스에 검은색 가디건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내 팔을 잡았다.

 

혹시, 너 승옥이 아니니?”

 

내 이름이 승옥인 건 맞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분명 어디서 본 듯도 한데.

 

애매하게 웃음을 흘리며 머뭇거리는 내게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나야 나! 박호봉. 부여 돌말! 얘 우리 바로 아래윗집 살았잖니. 어쩌면 나를 기억 못하니? 섭섭하다 야.”

 

! 그때서야 퍼뜩 떠올랐다. 그래. 너였구나. 박호봉!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내 손을 잡고 호봉이 말했다.

 

. 안되겠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저기 커피샵에라도 가자. 너 정말 보고 싶었어. 내가 얼마나 네 생각을 한 줄 아니?”

역사 안에 있는 커피샵으로 내 팔을 끌고 들어가서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함박꽃처럼 웃으며 반가운 인사가 늘어졌다.

 

부모님은 잘 계시고? 중학교 때 네가 대전으로 전학을 가면서 내가 몇날 며칠 얼마나 울었는지 아니? 너 전학가면서 금세 편지한다고 하더니, 기집애 통 연락도 않고. 너 정말 서운했다. 그래, 어디 살아? 대전이야? 어떻게 지냈어?”

 

대답할 틈도 없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질문으로 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냥 그렇지 뭐. 엄마 아버지 여전하셔. 미안하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어. 그래도 가끔 나도 부여 가면 네 생각이 났어. 너 서산으로 발령받아갔다는 말은 언니한테 들었어. 거기 사는 거야?”

 

서산에 살다가 지금은 광주로 내려가서 살아. 간 지 삼년쯤 되었지?”

 

눈이 반달이 되도록 함빡 웃는 모습을 보니 어렴풋이 어려서의 그 얼굴이 떠오른다. 웃는 모습은 여전하구나.

 

그런데 대전엔 무슨 일이야? 어쩌다가 여기서 만나냐. 정말 신기하다.”

 

수원 사는 작은외숙모가 돌아가셨어. 엄마랑 거기 문상 갔다가 내려오는 길이야. 엄마 내려드리고 나는 이제 광주로 가려고. 아까 얼핏 보고는 긴가민가했어. 너 참 많이 닮았다 했는데 역시 내 눈이 맞았구나. 이야. 정말 반갑다.”

 

외숙모? 수영이 엄마?”

 

.”

 

그래. 그렇게 되셨구나.”

 

나는 일순간 말을 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여태 혼자 사셨던 거야 그럼?”

 

그렇지 뭐. 외삼촌 돌아가시고, 큰외숙모는 돌말에 혼자 남아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 양반도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 작은엄마도 돌아가셨으니 뭐 그 양반들 그 떠들썩한 러브스토리도 이제 끝난 거지.”

 

호봉이 씁쓸하게 웃었다. 앞에 놓인 케익 접시에서 포크로 한 조각을 떼어내 먹지는 않고 그대로 잘게 뭉갠다. 바스라지는 케익을 보니, 내가 처음 카스테라 케익을 먹던 날이 생각났다. 그게 바로 수영이 엄마, 그러니까 호봉이 작은 외숙모네 집에서였다.

 

 

백마강으로 이어지는 샛강 앞, 넓은 논이 마을 앞으로 펼쳐졌다. 그 넓은 논을 가르며 신작로가 났다. 제일 꼭대기 집인 우리 집 마당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면, 한 여름날 무명천을 펼쳐놓은 것 같은 신작로 길을 알록달록 고운 양산을 쓰고 또각또각 걸어가던 호봉이 작은 외숙모가 보였다.

 

평생 자신의 손으로 밥을 지어본 적도 없고 빨래 같은 것은 더더욱 해 본 적도 없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세련되고 멋진 여자가 호봉이 작은외숙모였다.

 

형편이 조금 더 낫든, 그렇지 못하든 마을 여자들의 모습은 비슷했다. 일주일 내내 논밭에서 일하다 일요일 딱 하루,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돌말교회로 모였다. 그런데 그이는 교회에 가는 것도 아니면서, 보얀 분가루를 묻힌 얼굴로 구슬 백을 팔에 걸치고 살랑살랑 양장원피스를 입고 마을 한 중간을 가로질러 신작로를 런웨이 워킹하듯 다녔다. 무논에서 피를 뽑던 동네 남정네들은 침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넋이 나갔다. 그 꼴을 보는 안사람들 속이 좋을 리가 없었다. 모이기만 하면 임주사네 첩며느리 욕을 하며 이를 갈았다.

 

호봉의 외삼촌은 돌말 뿐 아니라, 그 일대의 문전옥답 대부분을 소유했던 임주사의 아들이었다. 임주사의 큰 딸인 호봉의 어머니가 박봉찬씨에게 시집을 가서 그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의 아내로 살면서 시들어가는 사이, 임주사의 외아들 찬영씨는 아버지의 무한한 기대와 응원 속에 서울로 유학을 갔다. 그리고 돈 많고 정 많은 그 시대의 남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시골에 아내를 남겨두고 멋지고 세련된 서울 여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뒤늦게 그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 난리가 난 임주사가 쫓아가 아들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나 서울 여학생의 몸에는 이미 여섯 달이 된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그 많은 재산을 갖고도 삼대독자 찬영씨의 후사가 없어 애가 타던 임주사에겐 귀가 번쩍 뜨일 소리였다. 서울로 쫓아가서 그 놈 자식의 다리몽댕이를 분질러 끌고 오겠다던 임주사가 혼자 돌아왔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며느리 볼 면목은 없으나 그렇다고 혼인한지 십년이 넘도록 자식을 못 가진 며느리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젊잖은 체면에 대놓고 말은 못해도 슬그머니 다른 생각이 들던 임주사는 큰며느리를 불러 다독였다.

 

며칠 후 신작로 길로 번쩍번쩍 윤이 나는 포니 자가용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자가용이 임주사네 높다란 대문 앞에 서자, 차 안에서 다리가 부러지기는커녕 맥고모자에 칼같이 주름이 잡힌 양복을 빼 입은 찬영씨가 새 각시와 함께 내렸다. 희디 흰 종아리 아래 반짝반짝 윤이 나는 에나멜 뾰족구두를 신은 서울 여자는 대문 앞에 모여든 동네 조무래기들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대문 앞에 모여서 까치발을 들고 서울 새각시 구경을 하다 난생 처음 초콜렛을 얻어 먹어본 아이들 중에 호봉과 나도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엄마한테 구미호 같은 년한테 거지같이 그런 주접스러운 것을 받아먹고 다닌다고 종아리를 작신 맞았다. 사정없이 줄이 간 종아리가 아파서 끙끙 앓으면서도 난생 처음 먹어본 그 황홀하던 초콜렛 맛이라니. 어른들이 뭐라 하건 그러니까 내게는 그 서울여자, 호봉의 작은외숙모의 첫 느낌은 그 초콜렛처럼 달콤한 것이었다. 게다가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연노랑블라우스는 얼마나 곱던지. 그 하얀 손가락으로, 콧물이 사정없이 지나가는 우리들의 볼을 어루만져줄 때는 우리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그저 감격스럽고 황송해서 몸이 꼬일 지경이었다. 호봉이나 나나 돌말의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게 희고 고운 손을 본 적도 없거니와, 어른들이 우리 볼따귀에 손을 댄다는 것은 세수할 때 사정없이 코를 비틀어 콧물을 쥐어짜거나, 땟국물을 박박 닦으며 쥐어박을 때 말고는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비틀거나 쥐어박지 않고도 그렇게 다정하게 쓰다듬어주고 눈을 맞춰준다는 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조무래기들이 먼저 그녀에게 퐁당 빠져들었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부자인 임주사네라 아무도 대놓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곱게만 보고 있을 마을 사람들도 아니었다. 애초에 동네 남자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찬영씨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화사한 젊은 여자가 마을 앞길을 다녀주는 것만으로도 기꺼운 마을 남자들이 동네여인들의 연합전선에 동참할리는 만무했다. 보이지 않는 싸움은 여자들의 것이었다.

 

여수같은 년. 감히 본가 안방을 차지하구 조강지처를 내처? 늙은 시부모 모시는 본처를 내치구 이 동네서 얼마나 잘 사는지 보자.”

 

말은 바루 허랬다구, 내친 건 아니구 그냥 아버지가 새 집으루 가버린 거지.”

 

그것두 올케라구 역성이냐?”

 

호봉이엄마가 눈치를 보다 우물가에서 이장마누라한테 한소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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