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도 센스가 없는 짓이었다. '즐거운' 연휴를 보내기 위해 호퍼의 그림책을 사다니. 이런 책은 삶이 지루하고 답답하고 외로워서 죽고싶어지는 이들이라면 절대 거들떠 보고싶지 않을 자화상 같은 책일 테고 아닌 사람들이라면 이 답답한 적막, 도무지 사람들 사이의 온기라고는 느낄 수 없는 숨막히는 고독이 싫어서라도 이해하고 싶지 않을 책 아닌가.
그림책을 보다보면 그림에 어울리는 글들이 좋아서 그 그림이 더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그림과 어울리지 않거나 군더더기 같은 현학적인 말들에 질려서 차라리 문장을 건너뛰고 싶은 경우도 있다. 이 책은, 그렇게 막나가는 문장은 결코 아니지만 도무지 호감이 가지 않는 설명(혹은 감상) 때문에 글 보다는 그냥 그림 보기가 더 좋았던 책이었다. 공들여 번역해준 이에겐 몹시 미안한 말이지만.
평소처럼 꼼꼼하게 읽어내려가다 글읽기에 마음을 줄 일이 아니라는 건 곧 깨달았다. 글읽기에 빠지기보다는 그림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이 더 좋았다. 호퍼의 그림에는 내 자메뷰(Ja mias vu.그 동안 많이 보아와서 익숙했던 것들이 마치 전혀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는, 그 낯섬이 불안하고 불편한)를 만나는 것 만으로 충분히 족하다.
호퍼의 그림을 보다보면 어쩌면 이 사람은 평생 다른 이의 가슴에는 들어갈 마음이 없었거나 깔깔거리며 맨 발로 춤을 춰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을 것만 같다. 물론 사회적인 품위는 유지될 만한 경제력은 있었겠으나 누구를 위해선 울어볼 여지도 없었고 누군가가가 그를 위해 그렇게 가슴 아파 해본 적도 없었을 것만 같은 그렇게 외롭고 말이 없었을 것만 같은.
물론 이것은 어이없는 편견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평탄한 삶을 살았고 그의 그림속의 여인들은 대부분 그의 아내가 모델이었다 하니 실제로는 아주 행복하고 믿음이 강한 부부관계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림만으로 보자면 그런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은 서로 바라보지 않고 한쪽 방향을 바라보고 침묵하고 있거나 (시선의 얽힘이 없는 자세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열정이나 슬픔, 절망 같은 감정들이 일체 배제된,막막한 침묵,고립,목적이 없는 일탈 같은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혼자이거나 혼자가 아니라도감정적으로는 혼자인 사람들이며 어딘가로 떠나거나 막 도착했거나 하는 길 위의 사람들일 때가 많고 그것은 구체적인 여행이 아니라 그저 떨궈졌거나 하염없이 어디로 가고 있거나 버림받은 사람들의 표정이다. 그림 속의 방들, 마당, 테라스, 호텔로비들은 아무 소리도, 소음 조차도 없을 것 같은 완벽한 침묵의 모습이다. 그들이 앉아 있거나 엉거주춤 서 있는 배경이 되는 집은, 가구도 많지 않은 적막한 방이고, 그들이 밖에 있다면 그 배경의 한쪽으로는 무언가 불안과 공포가 서린 어두운 숲이 자리하고 있을 경우가 많다.
그 방과 거리와 창가는 늘 우리가 만나고 기대고 살아가는 너무나 익숙한 삶의 한 부분이지만 호퍼의 그림속에서는 어딘지 다른 삶의 터인 것만 같은,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의 장소, 불안과 공포가 뒤엉킨 낯선 순간들이다.
호퍼의 그림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는 것은 좋지 않다.흑백사진속의 한 장면 처럼, 그 낯설고도 익숙한 외로움의 순간들이 너무나 가슴 깊이 파고들어 화폭 하나가 직설적으로 던지는 칼날에 가슴일 베이기 십상이다. 그것은 날카로운 단편소설 처럼 감동적이긴 하지만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다보면이 삶이 너무나나 외롭고 쓸쓸해서 나도 그만 저렇게 가방 하나를 들고 정처없이 어디로든 가게 될 것만 같다. 그리고는 또 저 여인들의 막막한 얼굴로 국도변의 손님이 드문 모텔 방 창가에서 막막한 편지를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오든지 가든지 올 곳도 갈 곳도 없는그림자를 그대로 달고.
그래도 한 장의 그림이 소리도 없이,눈부신 색감도 아니면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비명을 감추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랄만하지 않은가.
손에서 떼고 나서도 그 음험한 숲의 그림자가 머리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누가 그 숲에 들어가는가. 어둠이 웅크리고 응시하는 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제목 :시인이 말하는 호퍼-<빈방의 빛>
지은이: 마크 스트랜드
옮긴이 : 박상미
펴낸 곳 :한길아트
그룹명/낡은 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