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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드는 향기

by 소금눈물 2011. 11. 4.




갑자기 한밤중에 저하께서 빈궁마마의 처소에 듭셨습니다.





학문에 몰두하느라 후사에 관심이 없는 동궁을 걱정한 어마마마의 명으로 빈궁의 처소를 찾은 저하.
언제 빈궁전을 찾았는지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던 무심함이 미안합니다.





저하.
연통도 없이 처소까지 어인 일이시옵니까.





오랫만에 빈궁의 얼굴을 볼까 하고 왔소.



저하...


들어갑시다.

아름다운 지어미를 찾은 다정한 지아비.
가뭄의 단비 같은 발걸음에 행복에 겨운 빈궁마마.
다정한 말씀이 꿈만 같습니다.





미처 돌아가지 못하고 나인들 사이에 엉거주춤 서 있던 송연.

댓돌을 딛으려던 저하의 눈길이 걸렸습니다.





송연아.
어쩐 일이냐. 어찌하여 네가 빈궁의 처소에...





저하...

반가운 저하지만 주위의 눈길이 어쩐지 날카로와 기가 죽은 송연.





오늘 저 아이가 도화서 화원을 따라 처소에 그림을 그리러 왔습니다.
하여, 제가 불러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비천한 도화서 다모아이지만 저하의 동무라 고임을 받았다 하니 몸소 불러 차를 내리고 치하하였답니다.
얼마나 따뜻하고 어진 성품이신지.





그랬느냐...
궐에 왔었던 게로구나...






예 저하...





말없이 흐르는 두 사람의 눈길.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이 날 이때껏 궁 안의 꽃 같은 나인들에게 눈길 한 번 줘 본 적이 없는 저하십니다.
개유와에서 저하께서 낯선 계집아이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쿵 떨어졌던 빈궁전 상궁마마.
설마 목석 같은 저하께서...?





저하
밤공기가 찹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상고의 말이 귀에 들르지 않는 듯, 아니 지금 여기에 아무도 없는 듯 송연의 숙인 이맛전만 보고 계신 저하.




상고의 말이 맞습니다 저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저하의 모습이 민망하여 일러주시는 빈궁마마.





저하...
빈궁마마의 재촉에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두 사람의 눈길.




알겠소...

겨우 정신이 드신다 하였더니

너는 어디로 가느냐. 집으로 돌아가느냐?

!

예 저하...





이 무슨 말씀인가.
상궁 나인들 앞에서 빈궁마마를 욕보이자시는 것도 아니고 천한 다모 계집에 눈이 팔려 그 아이의 갈 길을 걱정하시다니.





밤도 깊었는데 어찌 가려는 게냐...
당신도 모르게 혼자서 타박타박 돌아가는 송연의 뒷모습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예...

황감하고 송구하기만 합니다.





이런 적 없으시다.
이런 분이 아니셨다...

지어미인 당신을 두고도 평소에 살갑게 품어주시는 분 아니시되, 원래가 여인에게 마음을 깊게 주시는 성품이 아니시어 그런 것이다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시던 마마.
궐에서 애오라지 임금의 성은을 바라보고 평생을 사는 여인들로 둘러싸인 자리라, 장차 곤전이 되실 것이나 한 여인으로서 이 자리가 족하고 기껍기만 했으랴.
허나 국모의 자리란 원래가 그런 것, 한갓 사가의 안주인이라 하여도 대를 잇지 못하고 나이가 들어가는 서글픔과 외로움이 어찌 작으랴.
지아비 저하의 눈길이 자신을 비껴갈까, 행여 자신이 마음에 차지 않아 찾지 않으심인가 두렵고 떨리던 밤들.

그래도 바라보면 늘 따뜻하게 보아주시고 당신 외엔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주었다 삿된 소문 하나 없던 깨끗하신 분.

그러셨던 분의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마마.
이 두려운 예감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폐세손 되신다, 전하의 노여움으로 그 아버지 마마처럼 될 지 모른다 온갖 흉악한 말에도 오직 저하만을 믿고 흔들리지 않았던 빈궁마마.
이 밤의 이 서늘하고 무서운 바람이 무엇인지 발밑이 떨립니다.





지엄한 분임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되
이 분이 어떤 분이셨던가 뼈에 사무치게 깨닫고 있는 송연.
동무라 하여주시니 미욱한 마음에 참말 동무였던 듯 어느새 자신도 여겼던가.

이렇게 곱고 어지신 분을 아내로 두신 분이거늘.
그 짧은 어린 날의 추억으로는 비교도 안될 시간속에서 두 분의 정은 얼마나 깊고도 깊었을 것인가.
짐작 못할 고난과 기쁨을 함께 엮으며 사신 두 분 아니신가...






댓돌로 오르려시다 몸을 돌려 다시 돌아보시는 저하.
낡은 무명옷을 입고 있지만 궁 안의 어느 여인들보다 맑고 빛나는 송연의 모습이 저하의 눈길을 잡고 놓지 않습니다.
차가운 빈궁전 밤바람 속에서 어깨를 좁히고 서 있는 말간 그 아이가, 어느새 훌쩍 큰 여인의 모습이 되어 저하를 오래오래 잡고 있었습니다.

소리없이 날아든 잎새 하나가, 조용히 푸른 나무가지에 걸려 쉬고 있었음을
저하도 송연이도 아직은 알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