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뭉텅이로 주문하면 늘 가장 늦게까지 남아 미적미적 넘겨지는 책이 꼭 있다.
아무래도 내 가난한 역량탓이겠지만, 그러다가 끝내 못 다 읽고 해를 넘기다 묵혀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라도 꼼꼼하게 줄을 그어가면서 보는 책이 있는데- 이건 후자의 것이었다.
행동하는 미국 지성계의 양심이었다는 수전 손택의 에세이다.
폴 굿맨, 레니 리펜슈탈, 발터 벤야민, 지버베르크, 카네티, 앙토넹 카르티의 작품들과 그 사람들에 대한 단상이랄까. 고통과 우울과 광기에 가득찬 철학자들, 예술가들, 그들에 대한 애정어린 평전인 셈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껍지 않은 책을 읽으면서, 내 형편없는 교양의 가벼운 무게를 다시 한번 절절히 깨달을 수 밖에 없던 것이- 위에 언급한 이 중에서 한번이라도 들어봤거나 주마간산격으로라도 읽어본 것은 발터 벤야민이 유일했다.
전혀 생소한 이름들을, 그 사람들의 전반적인 소개나 이해 없이 바로 그들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서 진지한 통찰의 속삭임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아 세상엔 잘난 사람, 대단한 사람도 많고 많구나.. 내내 느껴야 했던 한심함이다.
독자의 지적인 무장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펼쳐보이는 이에게 무어라 항변할 것인가.
제발 그 사람의 기본적인 소개라도 먼저 해달란 말이야~ ....너만 몰라~!
이렇게 나올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는 깊고 그의 통찰은 눈부시게 놀랍다...라고 전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문장이 어렵다는 것보다, 그가 이토록 뜨거운 애정을 갖고 있는 그 인물에 대한 기본인식이 전무하니 더 답답했던 것이다.
마치 <다모>를 보지 않고 다모폐인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난감함 같은 것 말이다.
하긴 그렇다고 해도 중간중간 날아온 화살처럼 박히는 그녀의 말들은 기어이 노트를 찾게 한다.
- 파시스트 미학은 생명력을 억제하는 것에 기반한다. 움직임은 절제되고, 경직되고, 억제된다.
-진실은 지식의 영역에 투사되는 것에 저항한다. (벤야민)
훈련삼아서라도 책 좀 읽어야겠다.
이러다 머리에서 굴러다니던 자갈이 튀어나와서 발등 깨지겠다.
제목 : 우울한 열정
지은이 : 수전 손택
옮긴이: 홍한별
펴낸 곳: 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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