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23/2004 06:57 am조회수 1 16
길도 없는 길 위에 주저앉아서
노방(路傍)에 피는 꽃을 바라보노니
내 생의 한나절도 저와 같아라.
한창때는 나도
열병처럼 떠도는 꽃의 화염에 젖어
내 온몸을 다 적셨더니라
피에 젖은 꽃향기에 코를 박고
내 한몸을 다 주었더니라.
때로 바람소리 밀리는 잔솔밭에서
청옥같은 하늘도 보았더니라.
또한 잠 없는 한 사람의 머리맡에서
한밤내 좋은 꿈도 꾸었더니라.
햇볕이 아까운 가을 양지녘에서는
풍문처럼 떠도는 그리운 시를 읽고
어쩌다 찾아온 친구에게는
속절없는 내 사랑의 말씀도 전했더니라.
긴밤의 괴로움도 제물에 축이 났어라.
이제 모질고 설운 날은 지나갔어라.
빈 집에 홀로 남은 옛날 아이는
따뜻한 오월의 어느 해 하루
툇마루를 적시는 산을 벗삼아
잔주름 풀어가는 강물을 본다.
-< 쓸쓸한 봄날 >
밖에서 밥을 먹을 일이 있었다.
생각없이 간 장소였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다보니 갑자기 가슴이 쿵 떨어진다..
나...여기..기억해..
혼자 서 있는데도 누군가 뒤로 깍지 낀 내 손을 가만히 잡아주는 듯한 생각이...너무나 선명하게 든다.
발 아래 도시의 야경이 펼쳐진 스카이 라운지.
스테이크는 질기고 맛이 없었고, 일행들의 즐거운 도란거림에서도 나는 혼자 뚝 떨어져 자꾸만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리와 같이 있는데 혼자서 앉아있는 듯한 쓸쓸함...
비스듬히 대각선으로 부딪치는 눈길..아 아닌가.. 오늘이 아니고 그때인가...지금은 없는 사람인가..
그렇군...지난 일이었군.. 바로 이 자리의 일이지만 그때는 모두 지나간 일이군...
새벽에 깨어 메일을 정리하다보니 어떤 아픈 이의 낮은 목소리가 들어있다.
견디거라...어쩌랴, 내 마음을 받을 수 없는 이에게 우리가 줄 것이 고작 이런 견딤 뿐이지 않느냐..
답장을 쓰다보니 얼마나 무책임한 소린가.
죽을 것 같은 외로움과 아픔 속에 있는 이에게 이런 말들이 무슨 위로가 될 것인가.
누군가는 외롭고,
누군가는 아프고....
견디고 이길 것이 많는 생은 외롭다....
박정만이 간 지 십 육년 하고도 스무 하루가 되었다..
-그후 나는 이날 이때까지 홀로 햇빛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데, 공해로 찌들은 햇빛마저 찬란하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해 다 하지 못한 내 죄의 형량만 크다. 이제 모든 세월은 갔다.
나를 걸고 넘어진 모든 여자들, 그래봤자 두 명, 그리고 나를 눈물로 축나게 했던 40세의 광야. 다시는 고통이 더 큰 고통 위에 쌓이지 않고, 다시는 슬픔이 더 큰 슬픔 위에 쌓이지 않으리라고 믿고 기대했던 나날들. 이제 그것들도 망각의 저편으로 묻어 버릴 차례인 것이다. 원컨대 다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그리워하는 일과, 기다리는 일을 하지 말게 하소서.
-시집 <저 쓰라린 세월> 의 산문 중
제목 ; 저 쓰라린 세월
지은이; 박정만
펴낸곳: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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