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세로 그 일생을 닫고 만 이 화가.. 따스하고 성실하고..신비하게까지 보이는 붓질은 아직도 우리에게 감동과 깊은 상념으로 이끈다.
베르메르의 그림을 한두 점 본 사람들이라면 금세, 아 이건 베르메르풍이구나..하고 쉽게 짐작이 되리만큼 그의 그림은 따뜻하고 성실하다.
전형적인 17세기 네덜란드의 중류층 가정의 소박한 부엌. 두건을 쓰고 긴 앞치마를 두른 여인네들은 막 시장에서 돌아와 식료품을 정리하거나 우유를 따르고 빵을 썬다. 레이스뜨기를 하는 고단한 여인네의 짓눌린 어깨. 그 신산한 살이가 어떤지를 골똘히 작업에 빠진 어깨로 보여준다.
동인도회사를 세우면서 그 국력이 한창 뻗어나가던 그 때 네덜란드에는 유난히 이름난 화가들이 많다. 문화적 토양이 그런가. 그 이름 하나로도 거대한 산이 되는 이들.
- 반 다이크, 램브란트, 반 고흐....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자기 길을 묵묵히 가는 예술가들의 삶은 고단한 것이어서 그 일생은 늘 자신을 속이게 되나보다.
이 영화는 사실 베르메르의 그림세계를 보이는 영화는 아니다. 네덜란드의 국가적 보물로 여겨져 어떤 전시든 해외반출이 절대로 불가하다는 신비하고 매혹적인 걸작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 이 영화가 그 그림의 숨겨진 실화라고 보지는 마시라.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기는 힘들 것이다.
자 이제부터 강력한 스포일러가 곁들인 영화 이야기~!!
가난한 집의 딸인 그리트는, 아버지가 사고로 다치고 더 어려워지자 델프트의 이름난 화가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그녀가 처음 간 델프트. 원형 타일이 깔린 광장에서 잠깐 서 있는 그리트.
막막하고 두렵지만 그녀는 열심히 살아간다.
델프트 최고의 화가로 이름난 베르메르였지만 그 가정은 그다지 윤택하지도 않고 행복해보이지도 않는다. 과묵하고 외로와보이는 주인 베르메르는, 그 재능을 이용해 돈을 우려낼 생각밖에 없는 장모와, 남편의 예술 세계가 어떻든 아이들과 더불어 살고 자신의 치장에만 더 관심있는 아내, 베르메르의 화폭에 자신의 향락을 남기는 게 낙인 돈많은 후견인 라이벤 사이에서 나날이 소모되어가고 스스로의 문을 닫고 있다.
청소를 하기 위해서, 아내 조차 발을 딛지 못하는 그의 화실에 들어간 그리트. 그녀가 처음 본 그림의 세계는 신기하고 놀랍다. 청순하고 꾸밈없는 한 소녀의 눈빛에 매혹당하기는 베르메르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작은 움직임들, 편견없이 보는 그 맑은 시선에 자신도 역시 놀라는 베르메르.
둘은 점차로 그림을 매개로 사랑에 빠지고, 의심하고 감시하는 눈길을 피해 둘만의 작업공간을 만들면서 아무도 보지 않는 그들의 사랑을 그렇게 키워간다.
물론, 그들의 신분은 주인과 하녀였고, 그들은 그것을 잊지 않는다. 애틋한 마음, 불쑥불쑥 터지는 숨막힐 듯한 눈길. 혹은 몸길...
라이벤은 호시탐탐 이 청순한 소녀의 몸을 노리고, 점차로 이 비밀한 눈길을 의심하게된 가족들 사이에서 그 긴장과 열정은 도를 더해간다. 동네사람들이 호색한 라이벤을 염려할 때, 그리트를 사랑하는 동네 푸줏간 주인 아들 피터만은 그녀가 사모하는 이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아마도 그녀 스스로도 인정하지는 않았을.
사랑하는 여자를, 라이벤에게서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무력한 베르메르, 그에게 혼신을 다해 기울어가지만 자신의 몸도 마음도 지킬 힘이 없는 그리트.
그와 마지막 한 점 그림을 남기고 그녀는 그 집을 쫓겨난다. 그리트를 아꼈던 하녀가 나중에 그녀를 찾아와 물감으로 봉인한 것을 전해주고 간다. 가족들의 시선을 피해 둘만이 있던 비밀한 작업실 다락방에서 만들던 그 물감. 풀어본 보자기 속에는 그녀를 그렸던 그림 속의 진주귀걸이 한 쌍과 그 그림 속의 푸른 천이 들어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그림, 돈과 무관하게 정말로 한 사람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그렸던 베르메르가 그 사랑의 증거이자 흔적을 그렇게 그녀에게 전한다.
정말로 놀랍도록 아름답고 매혹적이고...열정적인 영화다.
그리고 정말로 너무나 섹쉬얼하다. 타는 듯한 눈길, 온 몸을 조여드는 듯한 그 숨막힐 듯한 시선의 긴장과, 가족들의 발자국소리가 오가는 다락방에서.. 물감을 으깨다가 잡히는 손길. 포즈를 취하며 부딪는 그 뜨거운 마음의 신호. 가까이 가지 못하고 또 멀어지지 못하는 애타는 갈망.
머리카락을 보여주는 것은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것 (아마도 혼기가 찬 처녀에게 그 사회의 규율이었는지?)이라 생각하는 그리트는, 피터가 졸라도, 그 머리카락 색깔이 무어냐, 길이가 얼마냐 아무리 졸라도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피터가 조심하라는 건 다른 이(라이벤)가 아니라는 말을 하던 날, 베르메르가 두건을 벗으라는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더 이상은 안돼. 저 사람에게 나는 더 이상은 안돼. 가지 마라 그리트.... -
그러나 그림 속의 포즈를 취하기 위해 몰래 두건을 벗고 헝겊을 두르려는 찰라, 그녀의 아름다운 갈색머리가 늘어뜨려지는 것을 베르메르는 보고 만다. 굳어버린 베르메르. 그런 베르메르를 떨면서 바라보는 그리트...출렁이는 머리채를 두고 그들의 시선은 그렇게 뜨겁게 얽힌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는데,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사이 마님은 또 아기를 갖는다. 확신 받은 적도 없고 보일 것도 아니었던 그녀의 마음은 질투로 불타고, 절대로 화실의 소품을 움직이지 말라는 엄명을 어기고 의자를 질질 끌어서 옮기고 만다. 왜 의자를 옮겼냐는 베르메르의 말에 그리트는 "답답"해서라고 한다.
도대체가, 그녀를 그렇게 타는 눈길로 바라보는 것이 고작일 뿐인 이 사람은, 자신의 그림 세계는 이 글도 못 읽는 무지한 하녀만 알아준다고 생각하는데 더는 어쩔 수가 없다. 그녀의 몸도 가질 수가 없고 마음도 지킬 수가 없다. 그녀를 모함해 쫓아내려는 딸의 모략에, "도와줘요, 도와주세요 주인님!" 그리트의 그 애원에 폭발하여 사나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집안을 뒤집어 버린다. 결국 혐의는 벗었지만 그녀는 이제 본격적으로 아내에게, 딸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노출되어 버린다.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는 그렇게 보이는 그들의 사랑과 보이지 않는 사랑을 함께 드러내는 작품이 되어 버린다. 그 그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장모는, 딸을 외출시키고 딸의 진주귀고리를 그리트에게 주어 모델을 서라고 사위에게 보내고-그렇게 단장한 그녀를 베르메르는 붓으로 맞는다.
머리를 단장하고 귀걸이를 들고 선 그리트.
"주인님이 해주세요..."
두려움과 설레임에 가늘게 떨리는 그리트의 눈가. 묵묵하게 바늘을 받아서 그녀의 흰 귓불을 뚫는 베르메르.. 선연한 붉은 피. 그리트의 감은 눈에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무엇을 연상하시는지? 맞다! 바로 그것이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얼굴을 잠깐 부여안고 눈을 감는 베르메르.핏방울을 닦는 흰 천. 그렇게 뚫린 귀에 아내의 (!!) 귀고리를 끼우는 베르메르. 그토록 격정적이고 뜨거운 정사장면을 나는 본 적이 없다.
터질 것같은 사랑은, 그렇게 붓질이 끝나자 마자 피터를 찾아가 황급하게 그의 몸을 찾는다. 피터도...짐작을 한다. -너무 서둘지 마.....
그림 속 그 소녀의 눈길의 의미가 어떠했는지, 그 귀고리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아내는 대뜸 "음란하다!" 일갈하며 통곡한다. 여섯 명의 아이를 갖고 뱃속에도 또 하나를 둔 아내지만 남편의 깊은 내면에는 한발짝도 들어가지 못했던 아내는 그렇게 내쳐진다. 늘 곁에 있어도 남편의 진정한 가슴까지는 닿지 못했던 그 절망. 한 여자로서의 질투 뿐 아니라, 경제적 능력이 없고 그럴 사회가 되지 못하는 그 시대의 여인으로서 자신의 위치가 위협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일생과 그녀의 아이들, 그 가정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는 뜻이다. 남편의 그늘이 아니고서 그녀가 무엇으로 살 수 있을까.
견딜 수 없는 연적으로서도, 가정의 심각한 파괴자로서도 더는 그녀를 남편 곁에 둘 수가 없다.
떠나는 그리트. 차마 말 못할 원망과 그리움과 어쩌지 못하는 그것을 그 남자 베르메르에게 호소하려고 그들의 다락방으로 달려간 그리트. 그러나 그녀는 방문을 열지 못한다. 안다..그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거기까지가 그 사랑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문 앞에서 조용히 흐느끼다 물러서는 그리트.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이 다시 한번 머물고...
그녀의 발자국 소리와 흐느낌을 들으며 눈을 감고 있는 베르메르.. 그에게도 이 사랑이 전부였는데. 어쩌면 그 그림 하나로 그 마음은 닫혀야 할지 모르는데. 그도 어쩔 수가 없다. 그녀가 떠나는 것을 그도.
다시 선 광장. 똑같은 그 장소였건만, 그리트에게 그곳은 베르메르와의 사랑이 열리는 세계의 문이었고 또 닫히는 문이었다.
이런~!!
스포일러까지라고 했는데 홀라당 다 불어버렸다 ;;
어쩌면 그렇게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대로 베르메르의 그림 속 같았을까. 두터운 유화의 질감. 어떤 각도로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가던지 바로 그 그림 속이 되어버린다.
베르메르가 남긴 그림과는 거리가 있는, 그를 사랑한 한 하녀의 이야기였지만 또 이 영화는 철저하게 베르메르적인, 그래서 베르메르의 화폭이 되어버린 영화다.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연애에 대하여 中>
이성복의 시로 듣는 베르메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