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선거 전부터 맡은 숙제가 마감 기일이 다 되어가는데도 어쩌자고 손도 못대고 있다.
이러다 내일 모레 턱에 닿아야 또 급해질 모양이다.
내것도 아니고 남의 숙제를 해줘야 하는 처지에, (더구나 그게 학점과 직결되는 과젠데도) 어짜자고 이렇게 뭉기적거리고만 있는지..
그런데 이런 책을 머리맡에 두고 별로 생각도 안해본 생경스런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푼다는 건 정말 말도 안되긴 하다.
[난중일기]
이순신의 일기에 드러난 간결하고 깊은 문사적 기질이야 이미 소문난 바고, 이 책을 지은 김훈의 그 결곡한 문장도 또 이름 높은 바다.
사실 조선일보 주관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고 생각많은 작가들 중에서 이 상 거부움직임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는 걸 생각하면 심히 유감스러운 바지만, 어쨋든 글 하나만은, 그리고 작가의 그 재주로 보아선 정말 부럽고 아름답고.....좋다.
(다른 구비서 풀겠지만, 세상을 보는 작가의 눈과 태도는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자기가 사는 세상에 눈감은 작가란 이미 허무맹랑한 싸구려 가수에 불과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
성웅(聖雄) 이순신이 아니라, 단 열 척의 배로 수백배의 함대와 마주쳐야 하고,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해하려 드는 선조와 한심한 조정에 묵묵히 자기의 바다를 지켜가며 , 얼어죽고, 병들어 죽고, 도망치다 죽고, 주려죽는 부하와 백성을 바라봐야 하는 한 무력한 개인으로서, 가난한 장군으로서의 허무와 슬픔이 그대로 드러난다.
간결하고 되풀이되는 문장.
나의 밤은 짧다. 그들은 오지 않았다. 그들은 오지 않았다...식의.
읽다보면 견딜수 없이 쓸쓸해지고 버거워지고 덮어버리게 되는 이 무게....무게..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비장한 영웅으로, 사랑했던 한 창기를, 적의 노리개로 죽어버린 시신을 다른 시체와 더불어 묻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남자로, 아들의 죽음을 반추하며 命을 새기고 또 새기는 인간으로...
<이순신의 칼>
칼의 노래란 게 있을까.
<칼> 과 <노래>의 이 어울리지 않는 대척의, 혹은 대적의 명사화된 동사.
그의 칼은 노래한다.
그의 칼은 울기 전에 노래한다.
물들일 染자를 새긴 그의 칼은, 그가 잠못드는 밤 웅 웅 울며 그를 달래고, 죽은 아들이 자기 칼을 찾아달라며 제대로 붙어있지 않는 몸으로 밤마다 찾을 때 그 아들을 생각하며 노래한다.
숙젤 해야는데, 나는 이순신에 잡혀서 몇날 며칠째 명량바다에서, 섬진강에서, 옥포에서, 노량에서 머리풀고 헤메고 있다.
견딜수 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책이니 밤이 짧은 이들은 읽지 마시라.
사실 부피가 그리 크지 않은 책임에도 독서의 속도가 붙지 않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두 장을 넘기다 한숨으로 접게 되는 일이 잦아서다.
김현의 문학비평집을 모두 장만해서 내 책꽂이에 늘어놓고 흐뭇하게 보는 날이 오랜 소원이었다.
그의 책들을 읽다보면 메모하고 적어두기 바빠서 속도가 날 수가 없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김현이 쏟아놓은 그 엄청난 저작이 그가 죽음으로 끝이 있다는게 다행이기도 하다.. 욕심만 산같은 이에겐.
그런데 김훈의 이 책은 (김현과 김훈은 전혀 다른 인물이니 한장에 썼다고 헷갈리지 마시라), 그 간결함과 크지않은 부피에도 안나간다.
미농지를 조심스럽게 떠들어 보는 마음, 혹은 칼로 새긴 문장이 두려워서다.
아직도 칼의 노래를 나는 다 읽지 못하고 내내 안고만 있다.
숙제를 쉽게 할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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