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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낡은 서고

어떤 어미

by 소금눈물 2011. 11. 23.

 

 

<헥토르의 주검을 애도하는 안드로마케>

 



어디선가 내 첫남자(?)는 일리아드의 아킬레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 비운의 영웅이 얼마나 사정없이 어린 가슴을 흔들었던지 그 이후에 만나는 남정네들이 얼마간 아킬레스의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히드클리프, 김환, 그리고 황보윤에 이르기까지 비극적이고 가슴을 저며내는 처연한 사랑들이 모두 비슷했다. 운명에 거부당한 이 절대적으로 비장한 아름다움의 사내들...

자신이 트로이 전장에 나가면 죽는다는 신탁을 받고 숨었으나 끝내 오딧세우스의 기지로 끌려나왔다가 절친한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보고 분노해 결국 그 전쟁에 발을 들여놓고 만다.

폭풍 같던 이 무장은 그러나 그 전장의 시발이었던 파리스의 화살 하나로 죽고야 말았으니.

오딧세우스의 목마가 트로이 성안으로 들어가고 끝내 함락한 트로이를 두고 그리이스 함대가 해변을 떠나는 장면까지 나는 거의 목놓아 울었던 생각이 난다.

고작 국민학교 일학년 짜리가 말이다...

그 때는 아킬레스의 비극에 트로이 사람들의 한과 아픔을 이해하지 않았다.
전쟁의 시작은 분명히 트로이였으니 사필귀정, 망하고 죽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고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테티스의 통곡만 들어올 뿐이었다.
오딧세우스조차 싫었다.기지? 잔머리겠지. 나는 얇팍한(!) 꾀로 얻은 승리는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나보다.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큰 이득을 ,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얻어야 한다는 게 전쟁승리의 관건이라는 걸 모르는 어린 나이였으니.

전쟁을 치뤄야할 만한 명분이 과연 있기나 할까. 몇 사람 정치가나 권력가들의 시샘과 자기현시욕이 만든 죽음의 판에서 산을 만드는 시신의 주인들은 실상은 아무 힘도 없이 끌려온 불쌍한 백성들이다. 그들은 그들이 마주한 "적"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미움도 없이 그저 권력가들의 자존심의 소모품으로 쓰여질 뿐인 것이다.

나이들어 생각해보면 많은 신화 속의 슬픈 어머니가 수도 없이 등장했으나 트로이의 마지막 왕비 헤쿠바와 필적할 비극은 없었다.

 


잘못 둔 둘째 아들 파리스로 인해 나라는 전화에 휩싸이고 늙은 남편 프리아모스와 자신의 눈 앞에서 온 트로이의 맹장이었으며 또 트로이의 희망이었던 헥토르가 아켈레스에게 살해되어 전차에 끌려 트로이 성곽을 돌게 된다.
트로이의 비극을 예언했으나 사랑을 거절당한데 대해 앙심을 품은 아폴로의 저주로 아무도 그 신탁을 믿지 않는 무녀, 딸 카산드라도 역시 능욕당한 채 살해된다.
왕 프리아모스와 왕자 파리스의 죽음으로 기어이 나라의 문을 닫은 채 노예가 되어 끌려가던 헤쿠바는 다시 아킬레스의 유령의 요구로 마지막 남은 딸 폴뤽세나의 죽음을 보아야 했고 절망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그녀의 비극은 다하지 않았으니 단 하나 남은 막내왕자 폴뤼도로스. 이웃 트라키아로 피신을 보냈던 이 어린 왕자도 탐욕스런 트라키아왕 폴뤼메스토르에 의해 참살당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이 잔인하게 난자된 시체를 나타난 걸 기어이 보고야 만다.
그녀는 폴뤼메스토르의 시체를 확인하자 두 손으로 트라키아왕의 눈을 뽑아버리고 슬픔에 못이겨 개가 되어버린다.

이렇게까지 참혹한 운명이 있었던가.
어떤 왕조건 그 마지막 왕의 비극이야 달리 어찌 말하랴마는 멸망과 동시에 죽음을 맞은 프리아모스는 차라리 행복한 것이었다.

전쟁이 나면 가장 비참한 것이 여자와 어린아이라고 했던가.

아들을 잃었지만 영웅으로 대접받고 하늘의 자리까지 약속받은 여신 테티스는 자랑이겠으나, 일개 인간이어서, 영웅도 되지 못하는 약한 여인의 몸이라서 품안의 자식들을 모두 가장 끔찍한 방법으로 척살당하고 개가 되어 떠돈 이 여인의 한에는 신들조차 고개를 돌리고 가슴아파했다고 한다.

가장 불행한 여인
가장 고통스런 여인 헤쿠바.

저주를 받은 한 아들의 손짓 (자신들의 미모를 인정해달라는 세 여신의 시합으로 벌어진 이것이 트로이 전쟁이었다) 으로 인해 이토록 참혹한 일을 겪은 어미.
다시 있을 수 없는 비극의 여인이다.

 


 

 


그리고 케테 콜비츠가 있었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전쟁의 제단에 아들을 잃고 분노한 어머니의 힘으로 전쟁의 참상과 가난의 고통을 웅변한 판화가. 나치에 의해 핍박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양심과 어머니의 뜨거운 모성으로 도시빈민들에 대한 애정과 사회부정을 고발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들과 남편과 손자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공습으로 자신의 작품의 대다수가 파괴당하면서도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판화로 새기는 그의 모습은 트로이의 헤쿠바와 닮아있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아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아무도 가난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아이들은 시립구호소에서 굶주림에 떨며 여윈 어미 품안에서 절명했다.

착한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은 아직도 여전하다. 그들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용산의 불길 속에서 울부짖는 헤쿠바, 전경의 발길에 얼굴이 짖이겨지는 콜비츠.

 



대한민국은 그리고 내내 겨울이다.

** 판화는 케테콜비츠의 "이별-죽음, 여인, 그리고 아이 를 위한 습작 "

 

 

 

 

*조각에 대한 주석.

 

안드로마케는 프리아모스대왕과 헤쿠바왕비의 아들, 헥토르왕자의 아내였다.

안드로마케는 지금 아킬레스에 의해 죽음을 당한 남편의 모습을 슬픔에 잠겨 내려다보고 있다.

이 처연하고 아름다운, 그 와중에도 기품을 잃지 않는 모습으로 더욱 더 고통을 자아내는 이 아름다운 조각의 아랫부분에는 더 슬픈 장면이 새겨져 있다.

조각상 옆 부분에는 베일을 뒤집어 쓰고 아들의 죽음을 내려다보는 늙은 어머니 헤쿠바와 다른 한쪽에는 성벽 아래로 던져져 죽음을 맞게 될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이다.

 

절망과 고통 속에서 신의 잔인한 장난을 저주하며 죽어간 시어머니 헤쿠바와 달리 안드로마케는 그 몸으로 트로이멸망의 참혹한 모습을 겪어야 한다. 전장에서 남자들이 패배하면 그의 남자자식들은 씨앗을 남기지 못하게 죽음을 당하고 여인들은 승리자의 전리품이 된다. 지위고하, 왕비와 천한 종의 차이가 없었다. 안드로마케는 원수인 아켈리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의 전리품으로 넘겨져 그의 아들 셋을 낳는다.  아킬레스는 자신의 시부모와 남편을 죽였고 네옵톨레모스는 자신의 시누이와 아들을 죽였다. 그 자의 자식을 배고 낳고 키워야 했던 안드로마케.

 

여기에서 안드로마케의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네옵톨레모스가 암살을 당하고 안드로마케의 아들들이 또 다시 쫓기면서 목숨의 위협을 당한다.

트로이 왕가 여인들의 비극은 신들의 심심풀이 게임이 만든 결과로는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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