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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7

by 소금눈물 2011. 11. 17.

 

01/05/2004 06:07 am비공개조회수 0 1



어수룩한 시골양반이 있었다.
어울리잖게 사시 사철을 흰 양복을 떨쳐 입고 날마다 언니네 다방 카운터앞에 앉아 쌍화차를 마시는게 하우 정해진 일과였다.
찾아 오는 이도 없었으나 그는 매양 누군가를 기다렸고 하루 종일 묵은 신문이며 고서들을 뒤적이다 저녁무렵이면 또 휘적휘적 돌아갔다.

한창 일할 나이는 지났으나 또 어디 가서 어르신 소리를 듣기엔 빠른 늙지도 젊지도 못한 이였다.
행색을 보면 단단히 차려입고 나온 것도 같았지만 나와선 별달리 하는 것 없이 시골 읍내 다방에서 인생을 그럭저럭 보내며 살아가는 영락한 시골부자였다.

"저니? 시상이 저 냥반처럼 편하게 한 시상 사넌 양반이 또 있으까. 누대에 내려오던 문전옥답을 당대에 깨깟히 정리허고 복잡한 일 잊구 사는 양반이다. 저니가 건사혀준 어려운 니웃이가 한 둘이 아닐틴디 그이들이 그 은혜를 호구루 앙게 그렇지"

졸고 있는 그를 보다 누구냐고 넌지시 묻는 소리에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건네준 것은 마담이었다.
그가 그래도 눈을 반짝이며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다닐때는 그나마 선거철 한때 뿐이었고 그의 주위에 사람이 모여드는 것도 또 그때 뿐이었다.
별로 취급을 당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는 언제나 모인 사람들 앞에서 한국적 민주주의의 위상과 국민의 도리에 대해 목소리를 떨어가며 연설을 했고 모인 사람들은 사실 그의 말보다는 점심값에 더 관심을 보였다.

늘 한 어깨를 겨루는 이처럼 떠올리는 영도자의 노고를 걱정하는 그의 한숨은 그러나 그 몇달 뿐의 일이었고 당선자는 늘 다른 사람이어서 몰려든 군중도 또 그만큼 빨리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어쩌면 목소리 크게 누군가 앞에서 내세울 수 있는 그 몇달을 위해 그는 견뎠고 그때의 사람들의 관심과 환호로 또 나머지 세월을 버티는 것 같기도 했다.

다방이 복잡한 장날이면 붙박이 자리를 슬며시 비워주었다가 한산한 때에 다시 찾아와 차 한잔을 시키고 잠잠히 졸다 가는 그에게 마담이고 언니고 미운 눈길을 줄 일은 없었다.
이를테면 파리똥이 늘어가는 철지난 달력처럼, 박봉찬씨는 낡은 소파와 더불어 백제다방의 한 풍경이었던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