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종실록>13년 1월 17일 사헌부의 보고에 의하면, 안악군수 곽순종(郭順宗)은, 신천(信川)에서 고을 수령과 주석을 같이하고, 관비 우동(于同)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으며, 우동의 남편을 잡아 가둔 뒤 (~略)
-<조선의 뒷골목 풍경> 중 - 강명관.푸른 역사.
기생이든 관비든 사사로이 취하거나 그 행적을 마음대로 옮길 수 없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국가의 재산"이었다.
혹 사사로이 기생이나 관비를 취하는 자가 있었다면 국법에 의해 엄히 처벌 받았다.
원칙적으로 관비는 면천이 금지되었으나 시대에 따라 면천이 가능하기도 했고 다시 환천되기도 했다. 어쨌든 관비는 신분상의 이동이 불가하였고 그의 자손도 대대로 관노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윤도령의 희망이라면 당상관에 올라 자신의 신분을 극복한 다음, 임금께 죽기로 옥낭자의 신원을 고하고 그녀를 면천시켜주어 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오. 그런 다음에 그녀와 혼인하고 싶었을 것이오.그래서 늘 적극적인 고백이나 행동은 보이지 않소. 종사관과 그 수하 관비인 상황에서는 혼인하였다가는 왕명을 어긴 제율유기라는 죄가 되어 파직은 물론이고, 장 100대에 유 3천리에 처해지오.(속대전에 "품관이 관비의 신역을 면제하고 첩으로 거느린 자는 제율유기로 장100대 유 3천리"라고 하였소. 장은 장형, 매맞는 것이고, 유는 유형, 귀양 같은 것이오) 이를 아는 옥낭자가 윤도령의 사랑 고백을 덥석 받을 리 만무하오. 그래서 자신이 윤도령에게 돌덩이가 된다고 하였을 게요.
그러면, 앞의 속대전 조항에 조금 융통성을 두어 여기서 관비 채옥을 곡식을 내어 면천시켜 준 다음에 혼인할 수도 있을 것이란 가정도 할 수 있소. 아비의 역모에 연좌된 죄인인 이상 채옥의 면천은 임금이 허락해야 하오. 그리고 곡식의 양도 쌀 13石이나 있어야 하는데, 3개월에 祿米 각 12斗(말)와 콩(太) 5斗을 받았던 종사관의 박봉으로 어느 세월에 이를 모아서 면천시켜 줄 수 있겠소. 아마 이 녹봉으로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채옥이 입성이나 겨우 살펴주고 다른 관비들처럼 굶주리지 않게 살펴주는 게 다였을 것이오.……
(엠비시 다모 게시판 <조경란>낭자 글 펌- 옮기지 말라 하셨는데..ㅠㅠ)
채옥은 희망이 없었다.
일반 관비의 면천도 저토록 어려운 일이거늘 역손의 면천은 왕명이나 가능할 터. 더구나 역모의 주모자가 그 벌을 받기도 전에 자진하고 말았으니 면천은 꿈에라도 바랄 일이 아니었다.
황보 종사관이 재주가 아무리 뛰어나고 현감의 어엿한 자제라 하더라도 단지 서얼이라는 이유로 그토록 핍박을 받았다. 종 6품 종사관의 그 보잘것 없는 지위도 승군도총섭과 좌포장의 천거가 아니었으면 불가할 것이었다. 그런데 국법이 금하는 관노를 아내로 취하다니 도무지 가당키나 할 일이냐.
누군가 노적을 옮기면 옮겨지는대로 운명도 따라가야 했다.
혹시라도 누군가와 결혼을 하였다 해도 양반의 주연자리에 불리워지면 따라가서 수발을 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었다.
그 마음을 종사관이 알았고, 종사관의 마음을 옥이가 또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두 연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마음에 품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다.
눈 앞에서 서로를 보고 있는 것만이 허락된 유일한 위로이며 행복의 전부였을텐데.
그 작고 슬픈 행복을 위해 종사관은 그녀에게 칼을 쥐어주었고, 그의 뒷그림자에 숨기 위해 옥이는 그 칼을 받았다.
당신은 내 아비와 오라비였다 하나, 또한 살아가는 보람이고 꿈이었다 고백을 했다.
너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이 보잘것 없는 지위를 지킬 마음 없다 했지만 그녀의 안녕을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여인과 정혼을 해야 했다.
떠나간다...
꿈처럼 흘렀던 15년, 함께 했던 날들이 그들 인생의 전부였다.
저 사람을 위해 벼랑뜀을 하듯 살았으나 그래서 살아있는 희열을 느끼던 날들이었다.
생각하면 찰나처럼 스쳐간 행복의 날들, 마주치는 눈길속에서는 양반의 신분도 서푼짜리였고 개, 돼지 같은 관비도 천금 같은 여인이었다.
살다가 보면 또 만나지리라...
돌아돌아 사는 이야기도 귀에 닿을 날 있으리라...
하지만 그 때는 다른 이의 지아비이고 다른 얼굴의 관노일 뿐이겠지.
인두로 지져지듯 타는 이 마음은 잊을 날 있으리라, 기어이 잊혀질 날 있으리라.
그 때는 정말로 사람의 마음이 아니기로, 사람의 마음은 이제 여기서 땅에 묻고 돌아서야 하기로.
마음이 없는 허깨비로 살다 보면 남은 날이 백지의 강물처럼 막막히 흘러갈 뿐이겠지.
남은 날은 그렇게 온통 캄캄한 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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