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경을 지나고 사위는 물 속처럼 고요하다.
잠깐 눈이 그친 하늘위로 칼별 몇이 어깨를 움츠리고 떨고있구나
삼일 째 폭설,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모두 눈에 막혀있다. 젊은 사미승의 낭랑한 독경소리도 칠흙같은 어둠 속으로 떨어진 지 오래.... 세상은 끝도 없이 적요하다.
바람이 문풍지를 짓치는 소리에 몇 번을 깨어 뒤척인다.
아들아.... 내 아들... 윤아
부르기도 차마 아깝고 저린 내 아들아...
어찌 네가 내게 왔던가. 어떤 하늘의 이가 잠깐 눈을 감으셔 가장 빛나고 고운 별 하나를 내게 맡기니 그게 너였던가. 내 아들 이었던가.
만지면 닳을세라, 부비면 깨질세라 그리 귀하고 눈물겹게 안았던 내 아들아.
너를 낳던 해가 어미 나이 열 일곱이었느니라. 무엇을 알았으리. 매서운 안방마님의 눈 끝이 두려웠고, 지아비이기 전에 상전이었던 마님은 살갑기도 전에 어렵고 무거운 어른이셨다.
왜 너를 낳았냐고 물었느냐. 왜 하필 천출로 너를 내었냐고 그랬느냐.
어미, 눈 감을 때까지 차마 못 잊을 말이다. 차마 지우지 못할 말이다.
사람의 탈을 썼다고 종이 다 사람이었겠느냐. 어찌 입을 가졌다고 말을 할 수가 있었겠느냐. 이 어미 팔자 기박하여, 옥 같은 너를 수렁 같은 내 몸에서 내었으니...차마 어찌 네게 이 기막힌 속을 말하랴.....어미 가슴이 타는 듯하고, 불 이는 듯하나...어찌 이 속을 그 어린 네게 보였으랴....
네 나이 열 다섯에, 이 묘향산 관음사로 너를 계집종 하나 딸려 보내고, 네 아버지 한시라도 편히 주무셨겠느냐. 속내를 쉽게 보이는 어른이 아니었어도 나를 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눈이 깊으셨다...그 속을 뉘라 알리....뉘라 짐작하리...
어느 밤이었던가. 시나브로 병이 깊어지고 야위어지시던 가을이었다.
귀가 짧고 속이 얕은 아녀자에게 무슨 그런 말씀을 하셨다.
당신이 오래 머물지 못함을 짐작하셨던가, 재기가 승해 그것이 너를 다칠까 저어함이셨던가.
오늘처럼 달빛이 떨리던 밤이었다.
크게 쓰일 재능을 지니고 자기의 뜻을 굽혀 반드시 쓰임을 추구한 경우가 있다. 그들에게는 시절이 꼭 밝을 필요도 없고 도(道)의 크고 작음도 따질 필요가 없다. 세상과 함께 부침하고 때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여, 쓰임의 여부가 항상 자기에게 달려있고, 결국 자기를 버리고 쓰이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으니 관이요(관중)같은 무리가 그런 사람들이다....
아직 어린 너에게, 더구나 가까이 하여 속 깊은 정을 보이기 어려운 처지의 너에게 차마 전하여 이르지 못함을 그토록 아파하셨느니라.
생각하면 애가 끊어지고 산이 무너질 일이다. 그 어른 그리 가시고, 내가 그 모진 세월 살아남은 것은 오직 , 너 하나 입신양명하여 그 어른의 뜻을 마침내 이룸을 보게 하려 함이더니, 어찌 이리 너는 이런 모습으로 명부전에 누워있고, 늙은 어미 그런 너를 지키며 이 모진 세월 보게 하느냐...
나라를 구하고 사직을 지켰으니 다른 이에게는, 무관으로 된 자의 본분이고 학문을 익힌 자의 궁극이라 하겠느냐.
아들아. 어찌 이 심사를 그들이 알겠느냐. 애틋하고 막막하여 이 저무는 어미의 남은 날이 이 시리고 모진 칼바람에 대겠느냐, 너를 그리는 이 마음이 창천 허공에 외로이 걸린 저 달을 그리는 맘과 같겠느냐.
한밤에 몇 번씩 돌아누워 생각한다. 어린 너를 붙잡고 정녕 떠나서 우리 모자 숨어 사는 게 너와 나를 위해서 나았던가. 나라의 충신이라 하나 이 패이고 갈라진 어미 심정, 답답하고 기막혀 어느 결에도 생각다 보면 부질없는 회한 뿐이다.
밤이 이리도 모질게 길구나. 어쩌자고 저 바람은 저리 사무치게 울어대는가.
아들아. 내 아들 윤아.
너를 돌아보는 에미의 이 애닲은 마음이야 누가 알리. 어느 누가 이 단장을 알리. 꿈결에 다녀간 듯, 고왔고 고마웠던 아들아.
너를 내게 처음으로 주신 이께 이 죄를 어찌 다 갚겠느냐. 내 아들이라도 차마 함부로 쓰다듬지 못하게 귀하고 곱던 내 아들, 너를 내게 다만 잠깐 맡기신 것을 이리 허공중에 놓치고 어미 이 죄를 어찌 다 갚으리.
훗날에, 네 아버지 나를 보시면 무어라 아뢰올지...
나라에 그 쓰임을 다하셨다 나를 위로할 것이냐. 어찌 그리 놓쳤느냐 나를 원망하실 것이냐.
오늘도 바람이 불고, 인적마저 끊어진 무심한 산사의 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루며 너를 그리노라.
윤아.....윤아....내 아들...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