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눈물 2011. 11. 9. 15:58


창밖으로 옷깃을 잔뜩 여미고 종종걸음을 치는 행인들이 보였다.
그새 눈발이 한창 거세져 있었다.
바람까지 몹시 부는지 걸음들이 바빴다.

"여길 어떻......"

"거긴 자주......"

동시에 말을 꺼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학 때 운동을 했어. 한 이삼년 몰래 숨어 다녔지. 집 근처는 가지도 못하고 찾기 편하고 길모퉁이니까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꼬리 잡힐 염려도 별로 없고, 여기서 식구들하고 접선을 하곤 했어"

뜻밖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조회 때마다 상을 받던 기억밖에 별로 남은 것이 없는 아이였다.
때 되어 순탄하게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고 은행이나 대기업 대리쯤 되어 평탄하게 세상을 살아갈 친구로 여겨졌는데.

인섭의 얼굴을 새삼 쳐다보았다.
싱긋 웃는 얼굴이 그 말을 듣고 나선 지 어째 좀 더 깊어보였다.

"넌 그 사이트 자주 가니?"

"어디? 아 아이러브? 웬걸. 심심풀이로 남들 다 간다기에 한 번 가봤다가 이름만 걸어논 거야. 그러다 보니 가끔 친구들도 연락 오고, 그리고 너도 만나고. 이런 일이 생기네"

그 뒤로는 말끈이 줄줄 풀렸다.
서울로 간 동창들 얘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난 삼학년때 담임선생, 도망 다니다 잡혀서 끌려간 수원의 파출소에서 만난 동창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넌 어떻게 지내니?"

"어떻게 지낼 거 같아?"

"글세. 결혼도 하지 않았고 직장도 안 다니고. 너도 도(道) 공부하니?"

"도?"

묻는 말 치곤 소리난데 없는 소리라 나는 피식 웃었다.
시집도 못 가고 뭐 했냐는 말을 차마 대놓고 못하고 한심한 백수처지를 속으로 한참 비웃을 게 뻔했다. 그런데 내 씁쓸한 웃음에도 인섭의 표정은 아주 진지했다.
나도 슬며시 웃음을 거두었다.
반나마 남은 담배를 비벼 끄더니 표정이 자못 엄숙해졌다.

"나도 한때 이 맘 안 들고 도대체 가망도 없어 보이는 현실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
한 삼년 도망 다니는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갈 수도 없었어. 뭐 그땐 다 그랬지. 대학 다니면서 제대로 된 머리 가지구 그냥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놈이 어딨었니. 그 중에서도 난 좀 되게 겪은 셈이지. 그러다 요즘 마음을 두는 게 도야. 어차피 이 세상 부조리는 우리 인간한계선 벗어날 수 없어. 나 요즘서야 편하다 "

좀 어리둥절해졌다.
내게 도란 지하도 입구에서 팔을 잡아끌며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 에 불과했다.
앳띤 얼굴에 안 어울리게 도무지 엄숙하기만하고 허무맹랑하게조차 보이는 그 "도"에 진지하게 한 번 눈을 줘 본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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