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구현하던 것은 한반도의 지엽적인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라 (갑자기 인섭은 주위를 살피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른바 인터내셔널 소시얼리즘이지.
우리 본부는 여기가 아니고 독일이야.
미국이나 서 유럽 같은 거대 자본주의 토양에서 자라고 뿌리내린 사회주의와 제 삼 세계 사회주의는 근본이 다르고 그 적용되는 특성도 당연히 다를 수 밖에 없어"
재기발랄함과 총명함으로 어린 우리들의 넋을 빼놓던 몇 학번 위 선배의, 지금도 현장에서 맨몸으로 부딪쳐가며 우리를 부끄럽게 하던 모습을 연결해보려 했던 나는 아무래도 이 녀석과는 멀어도 한참 먼 그야말로 다른 우주끼리의 맞지않는 전파임을 알아차렸다.
내겐 도무지 하품이 나오는 소리였다.
학교에서 내라는 돈은 한 푼이라도 덜 내면 큰일날까봐 장학금 한 번 안 받고 자기계발에 남다르게 몰두했던 덕분에 사회의식이 덜 깨어 학생운동의 노선에 대해선 무지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도 하지만 어설픈 머리로도 인섭의 말은 도무지 기승전결이 되지 않았고 앞뒤가 짝이 각각 달랐다.
열심히 설명은 하지만 그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지향과 상이점을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피상적으로 열심히 나를 설득하긴 하지만 답답한 나처럼 아쉽게도 인섭도 그다지 많이 아는 것 같지도 않았다.
"부끄럽게도 난 그 쪽은 통 몰라.
하지만 서울이라고 여기와 별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우리는 선배들하곤 벌써 달라서 그런 건 시들하지 않았나?
그리고 말 그대로 지역적 특성이나, 민족구성원, 역사적 배경에 따라 그 사회의 가치관이나 갈등 구조가 다 다른데 어떻게 사회주의노선이라고 하나로 뭉뜽그릴 수가 있겠어. 그건 세 살 짜리 어린 아이도 다 아는 일이지.
그런 차이로 구태여 그 뭐 인터.... 암튼 그런 게 네 말대로 굳이 선을 달리 생각할 만큼 다른가? 그런 구별이 필요한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인섭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고 싶은 말은 그 치열한 시기에 자신이 얼마나 고난의 행군을 했는지,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솟던 인간한계의 답답함을 그 도로 인해 방향을 발견하고 얼마나 평안해졌는지를 설파하고 싶었지만 전하는 말이 짧고 듣는 귀가 얕아 답답하기 그지 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너는 유행도 벌써 지나간 한총련 같은 게 아니라 디트리히 본 회퍼나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사람들이 싸워 온 길을 사표로 삼아왔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렇지! 바로 그거야. 한반도의 분단된 현실에서 발로한 민족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전 세계 인민의 공통된 고통과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서 싸웠다는 말이지"
회퍼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어떻게 같고 다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인섭도 제대로 알고 하는 소리 같지도 않았다.
어설픈 자기현시에 스스로 감동한 한때의 투사와 무지하고 답답한 인민대중의 차이는 별로 없었다.
초등학교 때 똘똘했던 아이가 자라면서도 똘똘해진다는 규칙은 없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듣는지 우왕자왕, 좌충우돌 제 귀에도 믿음성 없는 소리만 서로 떠들다 나는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초등학교 동창이 이십 년만에 만나서 주고받는 화제 치곤 우린 참 대단히 거룩한 쪽인 거 같다. 세계평화 구현이나 우주의 진리 같은 데는 나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어"
없었어, 가 아니고 없어! 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면 인섭이 서운해 할까봐 마음 약한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한참 열이 올라 있던 인섭도 한순간 멍한 표정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그렇다. 내가 독립투사도 아니었는데 말야.
다들 잊혀졌지 뭐.
이러는 나도 그때 내가 얼마나 다급하고 절실한 마음이었던가 그런 건 하나도 기억 안 나고 쫓겨다닐 때 포항 해변가 허름한 식당에서 먹던 막국수 같은 게 생각나고 그래.
수배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어.
물론 올 수도 없었지.
그 참담한 소식을 들은 날 저녁인데 그 막국수가 그렇게 기막히게 맛있더라니까. 아버지가 서운해 하셔도 할 수 없어. 하긴 뭐 그렇게 효자도 아니었지만"
제 아이를 두고도 인연이 머문 거니 어쩌니 하던 녀석의 말은 금새 유치한 통속극처럼 변해 울적하게 했다.
아무래도 남은 원고 마감하고 저녁이나 먹을 걸 그랬다.
점점 더 유치해지고 감이 멀어지는 동창과 마주 앉아서, 가당찮게 혹시나 남들이 불편하게 볼까 저어하던 마음이 차라리 어이없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소금눈물
2011. 11. 9. 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