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밑줄긋기
춤추는 죽음 -2
소금눈물
2011. 11. 7. 22:39
*
중세 초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공동체의 일부라 생각했다. 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존재할 수 없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중세 전성기에 다가갈수록, 사람들은 점차 이제 자신을 공동체의 부속품이 아니라 독립된 '개인'으로서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개인적 정체성이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을 누르고 서서히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죽음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과거에 죽음은 인간 종의 보편적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는 보편적 사실보다, '나도 죽는다'라는 특수한 사실에 관심을 갖기 싲가한다. 여기서 중세 초기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죽음이 탄생하는데, 이에 아리에스는 '나의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나의 죽음..
p.99
죽음은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럼 영혼이 떠난 육체는? 물론 썩을 수밖에 없다. 중세 초기의 호모 토투스는 영혼과 육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잠을 잤다. 물론 그 당시에도 시체는 썩었을 터이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머리속에선 썩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이 영혼을 떠난 신체로 파악되자, 시체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중세 전성기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허구적 관념 대신 실제의 죽음에, 말하지만 악취를 풍기며 구더기에 뜯어 먹히는 흉측한 시체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마카브르(macabre)'라는 주제다.
'마카브르'란 썩어가는 시체에 대한 묘사를 가리킨다.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 석관(石棺)에 썩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새겨넣곤 했다. 왜 그랬을까? 그건 이 시기에도 여전히 죽음이 죄의 값이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지은 원죄,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죄의 댓가가 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죄인은 죽는다. 거꾸로 말해 죽은 사람은 죄인이다. 죽음은 죄의 징표고, 썩어가는 시체는 죄인의 표시다. 그리하여 썩어가는 시체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신 앞에 자기가 지은 죄를 겸허하게 고백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p.105-106
<3인의 생자(生者)와 3인의 사자(死者)>는 <죽음의 춤>, <죽음의 승리>와 함께 중세 마카브르의 3대 장르를 이룬다.
죽은지 얼마 안 된, 막 부패가 시작되는 시체부터 트란지를 거쳐, 온전히 썩어 해골이 된 세 구의 시체와 비교하여, 고귀한 지위, 생생한 젊음,명예를 갖춘 살아있는 세 젊은이가서로 대조.
p.105
3 인의 생자와 3인의 사자, 두 그룹은 서로 완벽하게 대립한다. 한편엔 삶이 있고, 다른 편엔 죽음이 있다. 한편엔 부귀와 영예가 있고 다른 편엔 절대적 좌절과 상실이 있다. 한편엔 건강함과 아름다움이 있고, 다른 편엔 흉한 몰골에 견디기 힘든 악취가 있다. 이 완벽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주는 것이 있다. Quod fuimus, estis; quod sumus, ertis! 원어가 주는 시적 효과를 맛보기 위해 어족이 비슷한 영어로 옮기면 이렇다.
We were what you are; You will be what we are!
(우리도 과거엔 너희와 같았고, 너희도 장래엔 우리처럼 될 것이다!)
<(죽음은) 아카디아에도 있다> 가 연상되지 않은가!
p.113
<죽음의 승리>는 이렇게 죽음의 맹목성, 죽음의 부조리를 표현한다. 여기서 죽음은 가난한 사람들, 구차한 목숨을 거두어 가 달라고 애걸하는 거지나 불구자들, 또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젊은이들을 슬쩍 비켜간다. 반면 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정없이 활을 쏘고 낫을 휘두른다. 말하자면 정작 죽음을 원하는 자들은 피해가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찾아간다는 얘기다. 이 역설, 이 아이러니, 이 부조리가 <죽음의 승리>의 본질을 이룬다. 이렇게 보면, 더러 살려주기도 하는 자비로움이 실은 신분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는 공평함보다 훨씬 더 잔인한 것이다.
<3인의 생자-->에서는 죽은 자들이 산 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 대화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비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의 죽음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다. 여기선 대화를 나눌 시간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비열한 기습과 일방적인 학살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의 승리>에 텍스트가 없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묘사의 사실성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서 나타는 죽음은 중세인들이 끔찍이도 무서워했던 것, 즉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죽음 (mors improvisia)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고 하루종일 브뤼겔과 벡신스키의 그림을 찾아보았다.
브뤼겔의 죽음과 벡신스키의 죽음은 분명 다르지만.
p.121
<죽음의 춤>의 내용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원무(圓舞)다. 여기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대개 썩어가는 시체로 묘사되고, 산 자들은 그 당시 사회에 존재했던 다양한 신분을 대표한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하나씩 짝을 짓고 이 쌍들이 고리처럼 이어지는데, 이 대열 속에서 대개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의 동작이 더 활발하게 묘사된다. 이로써 춤을 주도하는 것이 죽은 자임을 알려준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을 악마으 방향인 왼쪽으로 이끌어가고, 그 움직임의 끝엔 종종 납골당이 있다. 그 앞에는 죽음의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며 사람들을 납골당으로 맞아들이고, 그 옆에 설교자가 서서 열심히 설교를 한다. 이게 전형적인 <죽음의 춤>이다.
p.134
*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글자 그대로 옮기면 '죽음의 기술' 혹은 '죽는 방법'이지만, 축약되지 않은 원래의 의미는 '악마의 유횩과 성자들의 보호 사이에서 성스럽게 죽는 법'이라는 뜻.
페스트 사망자의 급증으로 성직자의 보호와 인도 없이 죽음을 맞는 이들을 위한 책. 문맹자들을 위한 삽화로 그려짐.
중세초기에는 예수의 신성이 강조되면서 우주의 지배자, 인류의 심판자로 주로 그려짐. 십자가상의 예수를 되도록 피하려 함. 중세 전성기, 고딕을 거치며 수난이 강조되기 시작.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함으로써 신성을 증명하는 과정. 13세기에 들어서 <그리도의 책형>이 등장. 인간으로서 당하는 죽음의 고통을 폭발시켜 보여주는 것은 르네상스에 이르러.
p.198-199
발동의 그림 속에서 나타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 새로운 시대의 전조.
도상학적으로 보아 이렇게 눈을 가린 채 묘사되는 인물은 셋밖에 없다. 사랑의 신, 운명의 여신, 그리고 죽음의 신. 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도 묻지 않는다. 눈을 가린 안대는 이 '맹목성의 상징'이다.
응? 안대로 눈을 가린 여신- 하면 나는 디케가 제일 먼저 연상되는데?
셋'밖에'없다니. 희랍신화를 그가 몰랐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법'의 도움이나 방해를 여러 번 받아온 진중권이!) 물론 이 구절에서처럼 '맹목성'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안대라면 분명 디케는 예외겠지만 눈을 가린 채 묘사되는 인물이- 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흠.
p.234
진중권 <세종서적>
중세 초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공동체의 일부라 생각했다. 공동체를 떠난 개인은 존재할 수 없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중세 전성기에 다가갈수록, 사람들은 점차 이제 자신을 공동체의 부속품이 아니라 독립된 '개인'으로서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개인적 정체성이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을 누르고 서서히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죽음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과거에 죽음은 인간 종의 보편적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는 보편적 사실보다, '나도 죽는다'라는 특수한 사실에 관심을 갖기 싲가한다. 여기서 중세 초기와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죽음이 탄생하는데, 이에 아리에스는 '나의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나의 죽음..
p.99
죽음은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럼 영혼이 떠난 육체는? 물론 썩을 수밖에 없다. 중세 초기의 호모 토투스는 영혼과 육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잠을 잤다. 물론 그 당시에도 시체는 썩었을 터이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머리속에선 썩지 않고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이 영혼을 떠난 신체로 파악되자, 시체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중세 전성기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허구적 관념 대신 실제의 죽음에, 말하지만 악취를 풍기며 구더기에 뜯어 먹히는 흉측한 시체의 모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마카브르(macabre)'라는 주제다.
'마카브르'란 썩어가는 시체에 대한 묘사를 가리킨다. 당시의 사람들은 자기 석관(石棺)에 썩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새겨넣곤 했다. 왜 그랬을까? 그건 이 시기에도 여전히 죽음이 죄의 값이었기 때문이다. 아담이 지은 원죄,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살면서 지은 죄의 댓가가 바로 죽음이다. 그래서 죄인은 죽는다. 거꾸로 말해 죽은 사람은 죄인이다. 죽음은 죄의 징표고, 썩어가는 시체는 죄인의 표시다. 그리하여 썩어가는 시체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신 앞에 자기가 지은 죄를 겸허하게 고백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p.105-106
<3인의 생자(生者)와 3인의 사자(死者)>는 <죽음의 춤>, <죽음의 승리>와 함께 중세 마카브르의 3대 장르를 이룬다.
죽은지 얼마 안 된, 막 부패가 시작되는 시체부터 트란지를 거쳐, 온전히 썩어 해골이 된 세 구의 시체와 비교하여, 고귀한 지위, 생생한 젊음,명예를 갖춘 살아있는 세 젊은이가서로 대조.
p.105
3 인의 생자와 3인의 사자, 두 그룹은 서로 완벽하게 대립한다. 한편엔 삶이 있고, 다른 편엔 죽음이 있다. 한편엔 부귀와 영예가 있고 다른 편엔 절대적 좌절과 상실이 있다. 한편엔 건강함과 아름다움이 있고, 다른 편엔 흉한 몰골에 견디기 힘든 악취가 있다. 이 완벽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주는 것이 있다. Quod fuimus, estis; quod sumus, ertis! 원어가 주는 시적 효과를 맛보기 위해 어족이 비슷한 영어로 옮기면 이렇다.
We were what you are; You will be what we are!
(우리도 과거엔 너희와 같았고, 너희도 장래엔 우리처럼 될 것이다!)
<(죽음은) 아카디아에도 있다> 가 연상되지 않은가!
p.113
<죽음의 승리>는 이렇게 죽음의 맹목성, 죽음의 부조리를 표현한다. 여기서 죽음은 가난한 사람들, 구차한 목숨을 거두어 가 달라고 애걸하는 거지나 불구자들, 또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젊은이들을 슬쩍 비켜간다. 반면 살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정없이 활을 쏘고 낫을 휘두른다. 말하자면 정작 죽음을 원하는 자들은 피해가고,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찾아간다는 얘기다. 이 역설, 이 아이러니, 이 부조리가 <죽음의 승리>의 본질을 이룬다. 이렇게 보면, 더러 살려주기도 하는 자비로움이 실은 신분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는 공평함보다 훨씬 더 잔인한 것이다.
<3인의 생자-->에서는 죽은 자들이 산 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 대화가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비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하지만 여기서의 죽음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다. 여기선 대화를 나눌 시간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비열한 기습과 일방적인 학살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의 승리>에 텍스트가 없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묘사의 사실성 때문만이 아니다. 여기서 나타는 죽음은 중세인들이 끔찍이도 무서워했던 것, 즉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죽음 (mors improvisia)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고 하루종일 브뤼겔과 벡신스키의 그림을 찾아보았다.
브뤼겔의 죽음과 벡신스키의 죽음은 분명 다르지만.
p.121
<죽음의 춤>의 내용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원무(圓舞)다. 여기에 나오는 죽은 자들은 대개 썩어가는 시체로 묘사되고, 산 자들은 그 당시 사회에 존재했던 다양한 신분을 대표한다. 죽은 자와 산 자가 하나씩 짝을 짓고 이 쌍들이 고리처럼 이어지는데, 이 대열 속에서 대개 산 자보다 죽은 자들의 동작이 더 활발하게 묘사된다. 이로써 춤을 주도하는 것이 죽은 자임을 알려준다. 죽은 자들은 산 자들을 악마으 방향인 왼쪽으로 이끌어가고, 그 움직임의 끝엔 종종 납골당이 있다. 그 앞에는 죽음의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하며 사람들을 납골당으로 맞아들이고, 그 옆에 설교자가 서서 열심히 설교를 한다. 이게 전형적인 <죽음의 춤>이다.
p.134
*
아르스 모리엔디(ars moriendi).글자 그대로 옮기면 '죽음의 기술' 혹은 '죽는 방법'이지만, 축약되지 않은 원래의 의미는 '악마의 유횩과 성자들의 보호 사이에서 성스럽게 죽는 법'이라는 뜻.
페스트 사망자의 급증으로 성직자의 보호와 인도 없이 죽음을 맞는 이들을 위한 책. 문맹자들을 위한 삽화로 그려짐.
중세초기에는 예수의 신성이 강조되면서 우주의 지배자, 인류의 심판자로 주로 그려짐. 십자가상의 예수를 되도록 피하려 함. 중세 전성기, 고딕을 거치며 수난이 강조되기 시작.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함으로써 신성을 증명하는 과정. 13세기에 들어서 <그리도의 책형>이 등장. 인간으로서 당하는 죽음의 고통을 폭발시켜 보여주는 것은 르네상스에 이르러.
p.198-199
발동의 그림 속에서 나타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결합. 새로운 시대의 전조.
도상학적으로 보아 이렇게 눈을 가린 채 묘사되는 인물은 셋밖에 없다. 사랑의 신, 운명의 여신, 그리고 죽음의 신. 이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도 묻지 않는다. 눈을 가린 안대는 이 '맹목성의 상징'이다.
응? 안대로 눈을 가린 여신- 하면 나는 디케가 제일 먼저 연상되는데?
셋'밖에'없다니. 희랍신화를 그가 몰랐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법'의 도움이나 방해를 여러 번 받아온 진중권이!) 물론 이 구절에서처럼 '맹목성'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안대라면 분명 디케는 예외겠지만 눈을 가린 채 묘사되는 인물이- 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흠.
p.234
진중권 <세종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