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규장각

슬픈 매화도

소금눈물 2011. 11. 7. 15:01



어진화사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던 송연, 대전의 내관에게 길을 잡혔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상궁 나인이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편전으로 들게 되었습니다.
하늘 같은 주상전하를 뵈옵는 일도 망극한 일이거늘, 다모 주제에 지엄하신 전하의 침소라니요.
 
잔뜩 얼어붙은 송연에게 전하의 부드러운 옥음이 들립니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성가, 송연이라 하옵니다 전하.



좋은 이름이구나.
단아한 네 상과 잘 맞는구나.



망극하옵니다 전하.

무슨 일이신가.
행여 아까 어진화사의 일로 그러신가.
황감하옵게도 다모의 붓질을 용서하시더니 아무래도 큰 벌을 받을 지도 몰라 그저 떨리고 두렵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하의 영으로 상선영감이 들여온 것은 지필묵입니다.



혹 매화도를 그릴 줄 아느냐?



예?

뜻밖의 분부십니다.
그림이라면 나라안의 최고의 화원들이 도화서에 가득하고 전하의 하명만 계시면 당장 달려올 것을요.



내 오늘 문득 매화도가 보고 싶구나.
아까 널 보니까 귀한 재주를 지녔던데, 어떠냐, 오늘 날 위해서 매화도를 그려줄 수 있겠느냐?




어느 영이라고 거절하오리까.
전하의 안전에 감히 붓질이라니 떨리긴 여전하지만, 그래도 벌은 아닌 듯 하니 마음이 조금 놓입니다.




눈이 맑고 총명한 다모 아이의 붓질이 시원스럽게 백지를 뻗어나가는 것을, 전하는 그저 조용히 바라보십니다.



현이 없는 거문고가 울리는 듯,
잎새 하나 없는 죽은 나뭇가지가 싹을 틔우는 듯,
고요하고도 맵차게 흐르는 붓의 선.



여기가 어디라고 무섭고 떨리지 않을까.
허나 이내 거침없이 붓을 그어나가는 당찬 다모의 손짓을 전하는 그저 조용히 바라보십니다.



가지는 봉우리를 틔우고



그 봉우리가 다시 망울을 터뜨려 꽃씨를 내고



가득 피어난 홍매의 가지에 봄이 담뿍 날아와 앉았습니다.



붉은 꽃송이를 바라보다, 문득 전하는 당신도 모르게 한숨을 뱉습니다.

비슷하구나...



닮았다...




뜻밖의 말씀에 송연은 붓을 멈추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신가.
무엇이 닮았다는 것일까.



그 아이가 그리던 매화와 참 많이 닮았다.




참 좋은 재주를 지녔구나.

언뜻 올려다 본 저하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하였습니다.
눈시울이 붉어진 전하는 눈길을 마주치지 않고 머쓱 웃음을 지으시지만, 어쩌면 그렇게 슬픈 미소셨을까요.

어디서 이런 좋은 재주를 배웠느냐.




죽은 제 아비가 화공이셨습니다.



그래, 그럼 아비한테서 그림을 배웠느냐.

예, 전하.
밤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면 언제나 철없이 졸라대던 저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함께 붓을 쥐며 저에게 그림을 가르쳐주곤 하셨사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좋은 아비를 두었구나.




망극하옵니다 전하.



아비란 그래야지.
아비란 자식에게 좋은 기둥이 되어 주어야지.
헌데 난, 하나밖에 없는 아들한테도 손자한테도 그래주질 못했구나.




전하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걸까요.
이 그림과 꼭 닮은 매화를 그렸다는 분은 누구셨을까요.
다정하게 대해주질 못하고 이렇게 뒤늦게서 깊은 후회를 하며 눈물을 일렁이시는 전하의 심중 깊은 곳의 그 사람...




사랑을 너무 늦게 알아서, 그러나 또 어쩔 수 없어서
아비의 도리는 커녕, 어리석음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고 다시 손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마는 전하의 슬픔...




소문으로만 듣기엔 그렇게 무섭고 독하다는 전하셨는데
송연이 보기엔 전하는 그저 늙고 다정하신 할아버지 같기만 합니다.
이 분의 가슴에는 또 얼마만한 슬픔이 가득할까요.
감히 전하의 심기를 미편케 해드린 건 아닌지 송연은 아득합니다.

미천한 화공을 아비로 두었으나 다정했던 아비를 행복하게 추억하는 다모의 미소.
전하는 지금 세상에서 그 미천한 화공이 가장 부럽습니다.
아비란 그런 것이거늘, 그래야 하는 것이거늘...
한번도 따뜻하게 안고 어깨를 두드려주지 못한, 무심하고 독한 아비였던 당신.
저 붉은 매화도를 바치던 아들은 어디에 있는고.
그 착한 아들을 차가운 땅 속에 묻고 만 이 아비는 참으로 무엇이란 말인고.
사직을 위해 사사로운 정을 베어냈다 생각했거늘, 그것이 유일한 위안이었거늘.
천하에 미련하고 한심한 애비가, 국본을 요절을 내었다니, 그것도 제 손으로!

눈물을 보이며 편전을 나간 세손.
이제 다시 아득한 그 거리를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 전하는 참으로 무섭고도 외롭습니다.
죽어 그 아들의 얼굴을 어찌 볼지 아득합니다.
통곡을 하며 불러낼 수도 없는 아비의 통한.
매화도를 그려 바치던 그 미소가 이토록 사무치게 그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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