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묵죽도

"아버지가!"
"주검이 되어 돌아온 누이를 보고 내 어머니는 그날 밤으로 숨을 놓았다. 가난한 집에 입 하나 덜자고 궁녀로 떠밀어보낸 당신이 어육이 되어 돌아온 딸을 어찌 볼 수가 있었겠느냐. 천한 궁녀라 하더라도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 아니냐.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의 목숨이 개 돼지의 것과 다를 바 없더냐?
미친놈처럼 내 누이를 죽인 이를 찾았다. 찾아내면 내 손으로 사지를 찢어죽이고 나도 죽으리라 했다.
동궁이 뒤집어진 사건이어서 그 자를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동궁 익위사더구나. 날래고 활을 기가막히게 잘 쏜다던 사내, 세자의 수족으로 상대할 적수가 없다는 무관이었지. 내 무술로는 어찌해 볼 수가 없는 자였다.
늘 위협을 당하던 세자였기에 익위사들 역시 촉각을 세우고 있었으니 무슨 재주가 있어 근접이나 했겠느냐. 그 자를 만나기 위해 무술을 배워야 했고 익위사로 들어가야 했지.
눈에 들기 위해 참말로 개처럼 구르고 몸뚱이를 나무토막처럼 혹사하며 무예를 닦았다. 복수심에 나를 불태우며 지냈던 그 시간,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시험마다 장원이 아닌 적이 없게 칼날을 갈았고 내가 장원이 아니될 것 같으면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추악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그 자의 눈에 들어야 했고 가까이 가야 했으니까・・・・・・"
"만나셨습니까?"
"만났지・・・・・・"
이글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는 병방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찢어진 살의 고통도 잊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비로소 바로 옆까지 갔는데, 가 버렸는데・・・・・・
분명 숨통을 끊은 것은 네 아비 김형서가 맞았지만 내 누이는・・・・・・ 사도세자를 죽이려는 누군가의 도구로 희생된 것이더구나."
"도구・・・・・・였다구요?"
"누이와 각별히 지냈다던 나인을 찾아냈다. 오라비라 하니 내 앞에서 숨을 죽이고 울더구나.
사도세자에게 올려진 초조반상(아침 일곱 시 경의 첫 식사) 죽그릇에서 기미상궁이 은수저에서 독을 찾아낸 사건이 있었다. 상을 올린 나인이 내 누이였고.
동궁이 뒤집혀지고 고문을 당했지만 내 누이는 끝내 모른다 했고 그렇게 묻혀졌지.
어느 날 동궁의 잠자리를 보러 들어갔던 누이가 베개에서 피 묻은 칼을 발견했다. 누군가 세자를 저주하는 사술을 부린 것인지, 아니면 암습하기 위해 미리 넣어놓았던 것인지 알지 못하지.
그걸 찾아내고 벌벌 떨고 있던 누이를 발견한 것이 김형서였다.
지난번의 독살미수에서 죄를 증거하지는 못했지만 혐의를 벗은 것도 아니었던 나인아이의 손에 쥐어진 칼. 그리고 그곳은 세자가 침수 들러 들어오는 처소였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그 자리에서 붙잡혔지.
모른다고 아무리 항변한들 어찌 그 말이 먹힐 것인가.
거듭되는 암살의 위협에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세자에게 그 변명이 들렸겠느냐."
"배후가・・・・・・ 누구라고 하던가요?"
"아직도 모른다. 끊임없이 모함하여 마침내 사도세자를 뒤주로 몬 문숙의도 화완옹주도 입을 닫은 채 쫓겨났고 대비는 이 사건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불경하다며 펄쩍 뛰고 있으니.
당사자인 사도세자도 북망으로 돌아간 지 오래・・・・・・ 내가 지금 아는 것은 네 아비가 그날 밤 동궁에서 내 누이의 목덜미를 잡아챘다는 것과 누이는 자신의 짓이 아니었다고 제 동무에게 통곡했다는 말 뿐・・・・・・"
병방의 눈 끝에 물기가 비쳤다.
"지금은 모르겠다・・・・・・ 내 누이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엄청난 음모의 끄트머리에서 그리 억울하게 죽어버렸는지, 아니면 정말로 저 쪽 누구의 수족이 되어 일을 해치우지도 못하고 개죽음을 하였는지・・・・・・"
곧추세워져 있던 장작이 숯이 되어 불더미에서 또 한 번 툭 떨어졌다.
꽃가루처럼 불꽃이 화르르 일어났다 나풀나풀 잦아졌다.
내내 낮게 중얼거리던 병방의 입이 닫혀졌다.
나도 멀거니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다보았다.
"아버지에게・・・・・・ 그 말씀을 하였습니까?"
"뭐라 할 것이냐? 모년 모일에 당신이 죽인 동궁 나인 하나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난도질을 하였느냐 할 것이냐?
나도 그때 익위사였다. 주군을 위해서 익위사는 제가 가진 목숨이 없다. 어떤 손톱만한 위험 앞에서도 생각보다 먼저 칼날이 날아가야 하는 자들이 아니냐.
네 아비 김형서는 결국・・・・・・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결국, 금상이 보위에 오르신 첫 해 존현각에 숨어든 역적 강용휘와 전용문을 상대하다 목숨을 버렸다.
전모를 들을 길이 아예 사라져버렸으니 그날의 진짜 죄인이 누구였는지 누구의 사주였고 누구의 지시였는지 영영 알 길이 없다.
생각하면・・・・・・ 누이나 네 아비나 모두가 주인들의 권력싸움에서 주인들의 수족이 되어 당한 일일 뿐이니.
그리고 나나 너 또한 이렇게 만나고 또 어쩌면 그렇게 죽게 될 것이 운명일 테니・・・・・・"
"아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내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내 주위에서 끊임없이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그림자.
모두가 알고 모두가 말하고 있으나 또 내 앞에서는 입을 닫는 이름.
"겉보기로는 딱 백면서생처럼 살빛이 허옇고 마른 체구였다.
실제로 보기에도 칼보다는 책을 가까이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았지. 아마도・・・・・・ 괜찮은 집안이었으면 무관보다는 문관이 되었어야 할 사람이었을 게다.
그런 사람이 칼을 들고 화살을 날릴 때면 매처럼 돌변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무예가 탁월하고 신동소리를 들었던 사도세자에게 제일 흡족할 만한 사람이었지.
사도세자의 뒤에 언제나 병풍처럼 서 있던 무관.
밤이나 낮이나 퇴궐도 없이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그에게 유복자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구나."
비로소 말끝에 빙그레 웃음기가 떠올랐다.
아버지・・・・・・ 아아 아버지・・・・・・
풍문처럼 그렇게 내 언저리를 맴돌면서 그리움보다는 서러움과 외로움이 된 사람.
그 길을 따를까봐 어머니가 한사코 숨기던 사람.
"생각하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부질없고 쓸쓸하다.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도 찾는다는 것도 그럴만한 무게가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하물며 제 것이 될 것도 아닌데 남의 명예와 남의 지위를 위해 쓰여지고 버려지는 목숨들이 무엇을 하려 태어나고 무엇을 위해 죽는 것인가."
나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범처럼 병사들을 몰아부치고 혹독하게 매를 치던 이가 무슨 말인가.
병방은 나의 눈길에 대답하지 않았다.
밤은 길었고 달빛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멀리서 횃불을 든 무리들의 외침이 들렸을 때 그가 일어나 길게 뿔피리를 불었다.
* 그림 고암 이응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