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드리드에서의 에스프레소 한 잔.
사람마다 좋아하는 커피의 취향은 사람들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하고 그 사람의 삶의 순간에서 빛나는 한 순간을 만들어준 커피 한 잔에 얽힌 기억들, 추억들은 또 그 사람을 이루었던 행복의 시간들이나 많겠지.
커피의 다양한 원산지와 그 품질들도 참 천차만별이더라만 나는 그런 섬세한 맛을 논할 주제는 못된다. 우리집 찻장에 얌전히 노는 찻잔들을 생각하면 내가 맛보다 그 분위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것도 같고.
남자도 끊고 술도 끊고 내가 뭔 낙으로 이 세상을 건너가랴 (--;;) 하며 주구장창 위에 부어댄 게 커피인데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그 한잔을 생각하자니 2017년 스페인 여행이 생각난다.
마드리드였다.
밤비행기를 타고 스키폴공항을 거쳐 도착한 그날의 목적지는 마드리드 왕궁(Madrid Palacio Real)과 프라도미술관이었다. 프라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이 미술관은 내 오랜 꿈의 목적지였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삼분의 이가 바로 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벨라스케스 뿐 아니고, 고야, 라파엘로, 엘 그레코, 티치아노, 한스 멤링, 로베르 캉탱, 고야, 무리요, 요셉 드 리베라. 수르바란, 램브란트, 루벤스, 틴토레토, 브뤼헐, 뒤러, 히에로니무스 보스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그 이름 하나하나가 미술사 한 페이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대가들의 작품이 가득차 있는 곳이라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천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
플랑드르 화가들의 말로다 형언할 수 없는 그 보물들을 직접! 내가 볼 수 있었다니!! 2017년 추석연휴, 다시 없을 그 긴 황금연휴의 그 끔찍한 여행비를 기꺼이 감당하고 날아간 것이 지금도 너무나 다행이었다. 지금 스페인 모양새를 생각하면 안 갔으면 어쩔 뻔 했어!!
열 세 시간의 비행은 쉽지 않았지만, 그 프라도를 본다는 흥분으로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어차피 불면으로 못 자는 사람이라 시차 따위 아랑곳이다.
마드리드에 도착해 본격적인 투어를 시작하기 전 잠깐 쉬기로 했다. 시간을 정해 만나기로 하고 남정네들이 레알 마드리드 구장으로 가고 남은 우리는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마드리드 유일의 백화점이라는 엘 꼬르떼 엥글레스에 들러 쇼핑도 하고- .
휘적대고 돌아다니다 흩어진 일행을 기다리겠다고 들어간 작은 까페.
1.5유로의 에스프레소는 썩 훌륭했다. 나쁘지 않은 가격에 맛도 어머나 싶게 괜찮았다. 대낮에도 밝지 않은 그 이층의 까페는 엘 꼬르테 엥글레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욕심껏 들여놓은 의자로 통로는 비좁기 그지없고 인테리어라고 딱히 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 소박하고 작은 까페에서 마신 에스프레소 한 잔이 스페인 여행의 행복했던 첫 발자국을 만들어주었다.
너무 진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정도의 깊이와 향이 딱 좋았다. 밤을 꼬박 새고 무거웠던 머리와 지친 몸이 그 작은 한 잔의 커피에서 쉼을 얻었다.
아직도 혀끝에 맴돈다.
-Gracias. Fue muy bueno.
잘 마셨다는 인사에 주인이 싱긋 웃었다. 나는 진심이었다.
어떤 여행지든 특별히 기억나는 순간들이 있다.
지금도 가장 행복하게 추억하는 마드리드 여행의 첫 발자국은 그 에스프레소 한 잔이었다. 그 까페가 특별히 훌륭한 커피를 만드는 집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솔직히 돌아보자면 오랜 시간 꿈꿔온 순간을 바로 앞에 두고 심호흡을 하며 두 손을 모으고 먼저 만나는 눈웃음 같은 시간이 그 까페였을 수도 있다.
욕심보다 짧은 일정은 내 마음을 마드리드에 묶어놓고 왔으니 이 재난의 시간이 지나가면 기필코 다시 돌아가리라. 그때도 나는 그 까페에서 그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고 싶다. 레이나 소피아, 티센 보르네미사와, 쏘로야 미술관, 마드리드 왕궁 전시장과 작은 미술관들 - 손으로 다 꼽지 못하는 그 아름다운 그곳들을 그때는 마음 놓고 한 달은 죽치고 앉아 마음 편히 눈 속에, 마음속에 다 담으며 머물리라. 그때 내 발걸음은 조금도 급하지 않으리라.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별들의 숨결에 내 머리를 적시며 천천히 흘러걷겠지. 그리고 이따금 찻집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지구 반 바퀴 너머의 하늘을 잠깐씩 생각하리라.
다시 캐리어를 쌀 날을 기다린다.
좁고 지저분한 골목들 사이, 물고기처럼 흘러가는 사람들과 푸른 하늘들,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꿈결같던 알함브라 궁전의 추석 달밤도 그립다.
기대보다 너무 짜서 달아서 여정 내내 내 속을 힘들게 했던 빵과 하몽쯤은 잊어줄 것이다. 풍미도 모르고 분위기에 취해 먹다 인상을 찡그리던 그 와인들도 이젠 좀 폼나게 마셔줄 수 있다. 물론 그때도 여전히 비싸기만 하고 그 맛은 제대로 알지 못할테니 나는 커피가 더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다녀본 여행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여행, 스페인은 그 커피 한 잔이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