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길에 서서
여주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
소금눈물
2011. 11. 13. 11:21

명성황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으로 갈라진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을 찬탈한 일본에 의해 극도로 비하되고 왜곡된 면이 있기도 하겠고 당당하고 그 지혜로움이 뛰어나 조선을 삼키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시해해버렸다는 시각도 있고 또, 박태원의 소설 <갑오농민전쟁>에서의 이미지처럼 극도로 사치하고 외척만을 비호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결국을 나라를 멸망케 한 악녀로 생각하는 이도 있겠고.
어쨋건 간에 한 나라의 황후를 이처럼 잔인무도하게 살해하고 철저하게 짓밟은 역사도 없을 것이니 생각할 수록 기가 막히는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기념관 전경.

생전에 당신의 사진을 남기지 않았으니 황후의 영정은 상상화이겠다.
당차고 기개로왔던 여인.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다본다.
힘 없는 나라의 주군됨이 어찌 그리 참혹했던지...

기념관 앞 김남조시인의 시비가 있다.

기념관 한 쪽에 있는 생가이다.
원래 남아 있던 것은 안채 뿐이었으나 1995년에 사랑채,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한다.
숙종이 인현왕후의 친정에 사저를 내려 감고당으로 이름지었는데 명성황후가 여주를 떠나 왕비로 책봉될 때까지 여기에 머물렀다.왕비로 책봉되면서 이곳에서 머물렀다 한다.
쌍문중, 고교 신축계획에 따라 멸실될 위기에 처하자 여주군이 사들여 생가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봄햇살이 너무 따뜻해서 저 마루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감고당은 크지 않고 정갈하고 조촐한 양반집의 기품이 있다.

집이 참 단정하다.
요란스럽지 않고 저고리 동정이 맑은 양반의 얼굴 같다.

안채.
양반댁 안사람은 아마도 평생 이 좁은 마당에서 치마를 조용조용 끌다 일생을 마쳤겠지. 문득 가슴이 싸아해진다.


기름칠을 하고 반들반들 잘 닦은 대청마루.
그저 소박한 집이다.
왕후에게 내린 집이라기엔 놀랍도록 조촐하다.

행랑채.
아랫사람들에게 뭔 세간살이가 있었으랴. 잘해보았자 반닫이 하나 옳게 못가졌을 터.
그래서 그런지 옛집을 돌아보면 어디나 방이 지금보다는 참 좁다.
행랑방을 들여다보다 문득 옥이의 방이 생각났다.
어쩔 수 없는 다모폐인.ㅜ.ㅜ
우리 옥이도 이렇게 좁은 방에서 허리를 꼬부리고 잠이 들었겠지.
하기야 그 아이는 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무술수련에 쉴 새 없는 기찰에 관비노릇까지 다 해야 했으니...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는 그애의 자주댕기를 보며 우리 종사관은 얼마나 마음이 쓰라렸을까.
엉뚱하게 감고당에 와서 좌포청 생각을 한다.
하기야, 숙종대왕과 황보종사관의 포청이면 인연이 없지 않다.

설마 세간이 저 뿐이었으랴만 그래도 감고당의 실체가 딱 이랬다면 화려한 장신구며 세간도 넘치게 들여놓지 못했겠다.
조촐하고 단정했던 인현황후의 그늘이 엿보인다.

명성황후가 예서 나고 자랐다는 탄강 구리비다.
황후의 공부방이 있던 자리라 한다. 아드님이신 순종께서 황태자시절에 쓰신 비문이란다.

민유중의신도비.
묘가 여기서 가깝단다.


안채 뒤뜰.

별당.
새로 보수한 흔적이 보여 좀 생경스럽기는 하지만 역사를 잊지 않고 기록하여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는 노력이 좋아보였다.
어차피 역사는 이긴 자의 것이다.
그 때의 이야기는 후세의 우리가 진실로 알기 어렵고 그 또한 말하는 자마다 생각이 제각각이니 어느 것이 정실(正實)이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복제품으로 전시되고 있는 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의 칼날이 다시금 가슴을 서걱 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