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달빛이 물처럼 흐르던 밤
08/27/2004 05:57 am
먼 그대...
그날이었던가요.
바람이 불때마다 한쪽으로 우수수 쓰러지던 억새들, 늦가을 햇살이 짧게 산등성이에 드리웠다가 거두워지던 그 저녁.
가랑잎이 발 밑에서 바스락거리고, 마른 풀잎을 넘어가던 바람소리.
아귀가 맞지 않은 창문은 밤새 덜컹거렸고, 무명천을 풀어놓은 듯한 달빛이 새벽까지 가만히 머물러 있던, 국도변 그 모텔의 밤.
사랑이 무엇이었을까요.
오며가며 서로의 흔적을 새기고, 서로의 몸의 냄새에 익숙해진 후에 그때도 부족하게 남은 한가지 갈망을 다만 성욕이라고, 그렇게 밖에 쓰여질 수 없는 것일까요.
젊은 몸들이, 제 몫을 주장하는 그 사랑의 무게들이 일시에 흔들리며 소리칠때 그 타는 갈망을 그렇게 말할까요.
그것은, 지금에서 돌아다 보는 당신의 얼굴과 겹쳐, 소소하게 떠오르는 그리운 추억들과 더불어 한치도 그 무게가 덜하지 않은 사랑의 뒷면이었다 할까요.
들판을 걸어오며, 산길을 내려오며 익숙한 웃음이었고, 아니 그 오래전부터 조금씩 쌓아온 갈망이기도 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웃음에 익숙해지면서, 당신은 한 남자의 모습으로 다가왔고....그것은 필연적으로 몸을 가진 것들의 부름을 같이 끌고 왔습니다.
그래도...모든 처음은 설레임이기만 했겠습니까.
방문이 닫히면서 저는 가만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는 다 큰 제가, 산 같은 어둠의 무게로 가만히 당신이 안았을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에 통증이 먼저 왔습니다.
그 순간에서야 불현듯, 당신과 나의 거리가 느껴졌습니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어쩌면 당신도 내 것은 영영 되지 않으리라는 아득한 절망 같은 것이 왜 그때 느껴졌을까요.
두렵고 떨리던 사람은 오히려 당신이었지요.
당신의 입술이 가만히 내려왔을때, 제 팔이 가만히 또 당신의 어깨를 안았을때 이것은 단지, 사랑이나 성욕이거나 하는 것으로는 이름하지 못할 그런 이상하고 막막한 기분이었습니다.
당신....울고 있었어요....
한참이나 어린 여자의 품 안에서...당신 소리없이 가만가만 울었어요.
당신이 제게 얼마나 두렵고 큰 사람이었는데, 가끔 그 두려움이 아득해서 서럽고 혼자 아프다 생각했는데....그런데 당신의 그 소리없는 눈물을 보면서...정말 아프고 외로왔던 것은 당신이었던 것을 알았습니다.
저때문이었을까요.
글쎄요...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겠지요.
아직은 낯설고 설레임이 더 큰 이 새로운 감정에 당신이 흔들려버리고 괴로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고, 오래 익숙했던...그래서 다정하고 조금은 낡아지는 그 사람에 대한 미안함...그런 외로움....그런 것일 수도 있었겠지요.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손을 뻗어서 그 눈물을 닦아주었습니다.
제 손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당신의 입술이 따라왔습니다.
당신의 젖은 눈자위에 제 손을 대고....그리고 당신의 입술이 다시 그 손을 끌어내려 덮었습니다.
저는 마치, 어린 동생을 가만가만 달래는 다 커버린 누이같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당신의 손길이 제 블라우스 셔츠의 단추를 푸는 동안....저는 제게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이 달려있던 저 여섯개의 단추들의 의미처럼, 당신이 열어젖히는 오늘 밤이 어떤 의미로 나를 버겁게도 그립게도 할까..
흐린 달빛이 긴 밤을 흔드는 날은 그토록이나 숱하게 많았으면서, 조용히 물결지어 흔들리는 이 밤의 달빛을 나는 평생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당신의 가느란 숨소리가, 그때 내 배개옆에 있거나 없거나 간에 나는 문득 오늘밤의 달빛을 생각하며 견디어낼 날들이 없을까...
어깨가 드러나 낯선 추위에 오소소 떨리는 제 맨살에, 그렇게 또 다가오던 당신의 몸을, 차가운 시트에 잠깐 잊으면서 그 짧은 순간을 지나가던 떨림...아득하고 그리운 슬픔 같은 것이, 목울대를 치받는 뜨거운 감정과 뒤섞여서 한꺼번에 휘감았습니다.
사람의 몸을 받아서 그토록 기쁨이면서 슬픔이게 한 그 갈망을 당신은 무엇이라 하나요.
목덜미에, 어깨에, 젖가슴에 그리고 허리께에 따라내려오던 당신의 손길과 입술의 기억들을 당신은 어떻게 접어 그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던 가요...
그 밤의 기억이, 타는 듯한 갈망과 괴로움으로 그토록 고통스럽게 했고, 그것이 당신이 감당할 벌이 되어버렸으니...
이제서야....이렇게 미안하고 아픈 마음을 어찌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