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불이, 불이 (不二, 不離)
08/25/2004 06:28 am
아득히 먼 그대...
그 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둘이서 짧은 여행을 갔었지요.
들녘에는 가을걷이가 끝나가고 있었어요.
바람이 불 때마다 한쪽으로 우수수 쓰러지는 억새밭이 생각납니다.
들길을 오래 걸을때 우리들 발 밑에선 마른 풀잎이 바스락거리고, 낙엽이 쌓인 개울에는 돌돌 흐르는 물위로 파란 하늘이 잠겨 있었지요.
피로한 발을 쉬려고 잠깐 개울가에 앉았을 때, 작은 돌틈 사이로 잽싸게 달아나던 작은 물고기를 보았어요.
벌써 날은 쌀쌀해지는데...낙엽들 사이로 꼬리를 저으며 사라지는 물고기..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낮으막한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벌판 너머로 우르르 일어서는 새떼가 보였지요.
꾸륵꾸륵 소리를 내며 떼지어 날아오르던 철새의 무리.
어쩐지, 현실이면서도 꿈결의 어느 이야기인듯 막막한 기분으로 저는 새파란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것들을 무연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불현듯 알아버렸습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것을.
어쩌면 당신과 이렇게 꼭 하나인 마음으로 가을 속으로 함께 걷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을.
그렇게...끝을 맺을 거라는 걸.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 경계라는 말을 저는 같이 떠올려야 했군요.
사랑하면서, 그 사랑을 두려워하는 일이 자연스러울까요.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생을 받은 이들은 본능적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게 되면 행복보다는 두려움을 먼저 느끼게 되는 걸까요.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각, 당신이 언젠가는 제 곁을 떠나고 말거라는 두려움.
그때의 상처를 적게 하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는 제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지요.
어리석은 다짐이 되어버렸지만, 당신께도 힘겨운 일이었겠지만....
지나간 일들은 낡은 사진처럼 희미해져 새삼스럽게 잠자리를 설치게 하는 건 아니라 해도, 그래도 어쩌다 당신의 웃음이, 당신의 쓸쓸한 어깨가 그리운 날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 낡은 사진속의 날이... 바로 그 늦가을 들녘입니다.
그 들판을 다 건너가서 들어간 산 속에 오래된 절이 있었지요.
신라때 창건했다는 그 절은 퇴락했지만 오래된 서원들이 그대로 고여있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세월의 먼지가 그대로 내려앉은 대웅전 꽃창살들과, 절마당 한쪽에 고개를 늘이고 있던 보라색 쑥부쟁이.
귀퉁이가 조금씩 무뎌진 오래된 탑 아래 이끼가 조금 피어있었습니다.
대웅전 법당은 문이 열려 있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 풍경을 가만히 흔들면, 마당에 내려 앉았던 햇살이 잠에서 깬듯 바르르 떨고 그러다 또 천천히 고요해졌지요.
당신은 법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나를 보며 조용히 웃었고, 저는 당신의 시선을 비껴 절 담장위로 올라가는 담쟁이를 보았습니다.
그 담쟁이들은 뻘갛게 달아올라, 온통 시리도록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담장위로 가만히 떨어지는 꽃잎이 되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작은 잎들이 바스락거리다 천천히 떨어지고.
절집 지붕위로 벌어질대로 벌어진 밤송이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그리고 한참은 그림처럼 조용한 가을 오후가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그래요.
늦은 가을날 그 그림속에 저와 당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쌀쌀한 바람에 어깨를 흠칫 떠는 제게 당신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주셨어요.
절을 나오다 문득 뒤를 돌아본 당신이 그러셨습니다.
"불이문(不二門).불이..불이...."
의아하게 당신을 올려다보니 당신은 어딘가 쓸쓸해보이는 얼굴이었지요.
"불이. 절과 세상이 이 경계로 둘이 아니고,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고...만남과 이별이 둘이 아니고...그런 건가?"
"만남과 이별, 사랑과 증오도 둘이 아니겠지요"
"결국 마음자리 하나 디디는 걸로 달라지는 것이니 본디 둘은 아니겠지"
그러다, 이별을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다는 듯 곧 당신은 제 볼을 살짝 꼬집고 어깨를 가만히 안으셨습니다.
그해 가을은 거기까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