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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걸어들어가다.
소금눈물
2011. 11. 11. 16:18
사랑하는 당신.
지난 밤에는 당신의 꿈을 꾸었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부질없어, 기억해야할 것들은 움켜쥔 손목에 담긴 물 같아서 그처럼 흔적없이 잘도 빠져나가면서 잊어도 좋을 것들만 오래오래 우물을 만듭니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산길.
울창한 숲에서 낮도 밤도 아닌 시간속을 저는 헤매고 있었습니다.
상사화가 무리지어 피었다가 또 그처럼 쓰러지는 숲을 저는 자꾸만 길을 잃고 있었지요.
그 숲 어딘가에 당신이 있다는데, 꽃과 잎이 서로 만나는 상사화를 한가지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데.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더듬어 가고, 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못하고 멀어져가면서 발 밑에서 애꿎은 붉은 꽃송이만 으깨지고 있었습니다.
꽃과 잎이 만나는 상사화... 가능할까요.
그럼 그때도 그것을 우리는 상사화라 부를까요...
꿈길 어디쯤에서 목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선듯해서 잠이 깨었습니다.
아직 새벽은 오지 않았고, 흐린 달빛이 물속처럼 방 안을 흐르고 있었습니다.
점차 또렷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제 목에 닿은 그 느낌만은 너무나 선연했습니다.
당신의 입술이 닿던 어느 밤의 그 느낌.
가빠오는 숨결속에서 잃은 제 몸을 서둘러 찾듯이 휘어져 감기던 서로의 덩굴손처럼 뜨겁고 또 차갑던 그 밤들...
당신은 그때, 외로와지고 있었지요.
오랜 연애는 피로해지기 시작했고 당신의 그 여인은 당신을 기다려줄 수가 없었어요.
한때 설레고 따뜻했던 그 모든 것들이, 남루하고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려서 만나면 늘 눈길이 엇갈린다고 했어요.
제가 당신을 보기 시작했을때
당신은 누군가와 멀어지기 시작했고
당신을 제가 담기 시작했을때
저도 모르게 또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있었군요...
당신이 오는 요일을 기다리면서, 어쩌다 부딪는 눈길에 가벼운 목례만 주고받고 지나치면서 조금씩 저의 얼굴도 당신에게 익숙해지기 시작했겠지요.
그 건물 복도 끝 방, 외주업체 사무실의 작은 그림자 아가씨에서, 인사를 하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얼굴이 달아오르던 그 여자아이로요.
당신이 저와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을 그 즈음 알았군요.
제 사무실의 그 사람이 저를 바래다 주고 흔들리며 사라진 그 가로등 아래로, 당신도 지나치고 있었음을 저는 며칠 후에 알았습니다.
내가 걷는 이 길을 이 사람도 걷는다.
내 발길이 닿는 이 골목 어디를 당신도 지나다닌다...
갑자기, 그 골목 보도블록 하나까지. 길갓집 낡은 처마까지 이뻐보이고 설레던 나날이었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아침 출근길에서, 당신은 한참이나 갸우뚱하고 저를 보았습니다.
살짝 미소를 짓는 제게, 비로소 생각이 난 것처럼 환하게 웃던 당신.
"여기 사세요?"
"네"
"아 이런걸~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재미없는 동네였는데 이제 친구가 생겼군요. 가끔씩 우리 술동무나 합시다"
천성이 밝고 따뜻한 탓이었을까요.
겨울외투를 사철 내내 입고 다니는 사람처럼 굳었던 제 마음을 당신은 그렇게 서슴없이 열어젖혔고, 저도 그렇게 당신에게 걸어들어갔지요.
이제 당신은, 당신이 일주일에 한번씩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곳의 직원이 아니라, 당신이 아는 누군가로 새겨졌습니다.
아...
갑자기 목울대가 아파옵니다.
그 환하던 웃음이...잊혀지지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