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눈물
2011. 11. 11. 16:15
08/17/2004 09:30 pm
사랑하는 당신.
그렇다고 그것이 사랑이었을까요.
아마는 아니었을 겁니다.
김원무(金遠霧)라는 한 남자에 대한 연정이 아니라, 누구라도 사랑하고 싶고 누구에게라도 흔들리고 싶은 그 나이의 부름이 아니었을까요.
그랬을 겁니다. 그때까지는 분명히 그랬을테지요.
형체도 없이 가슴 한쪽이 저리고 슬퍼지던 그 저녁들의 서러움, 어쩌다 당신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복도를 지날 때 먹먹하게 아파오던 그 뿌리없는 낯선 감정들..
그렇다고 내 일상이 당신으로 인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건물설계가 들어가고, 근처 땅주인들과의 협상이 오가면서 제 일도 조금 바빠졌습니다.
관청과 건설업체와 또 작은 하청업체의 관계자들이 들락거리면서 저녁 늦게까지 일이 밀렸고, 병원 응급실 직원들과도 허물없는 인사를 주고 받을만큼 편해졌지요.
병원 로비 안까지, 저녁놀이 물결처럼 밀려들어오던 저녁이었습니다.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은 서류를 챙겨서 퇴근을 하던 날이었군요.
봄은 시나브로 접히고 있었습니다.
병원 뜰에서는 목련 꽃봉지가 깊은 밤이면 툭툭 터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처럼 한껏 벙그러있었지요.
막 현관을 나서던 제가 마침 들어오던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군요.
놀라서 고개를 드니, 당신이었습니다.
"아 그림자 아가씨. 이제 퇴근이시군요"
당신의 그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기억합니다.
그랬습니다.
당신은 저를 그림자 아가씨라고 부르셨어요.
몇번을 지나치면서 목례를 주고 받은 적은 있었으나, 그 병원 식구도 아니었고 당신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으니 어쩌면 저는 당신에게 당신이 하루에 스쳐가는 수많은 얼굴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텐데 그런데 저는 당신에게 흔적이 불분명하지만 그 불분명의 무게를 가진 이름으로 남아있었군요.
아니..어쩌면.. 이렇게라도 어떤 의미로 기억되고 싶었던 어처구니없는 제 착각이 당신의 따뜻한 친절을 이렇게나 과도하게 의식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그렇게 저를 부르셨어요 그날밤.
친절하고 다정한 미소를 가진 당신은 원래 누군가에게든 그런식으로 인사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그 친절을 저는 저 혼자 담아서 키운 것이겠군요...
이렇게나 멀리서, 다만 그때의 이야기들을 혼자서 반추해보고 있는 저로선, 그 그림자라는 말이 형체를 갖추고 있으되 그렇다고 실체도 될수 없던, 빛의 반대편에서 어렴풋이 존재할 수 밖에 없던 제 자신을 그처럼 정확하게 드러낸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픈 그대...
인사를 마주 하지도 못하고, 바보처럼 얼어버린 제게 당신은 다시 한번 미소를 짓고는 스쳐갔습니다.
뜰의 어디서쯤, 목련이 한송이 떨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온 힘의 무게를 기울여서 피었다가, 시절이 다 하면 속절없이 고개를 꺾는 그 마음이 그렇게 아프던 봄밤이었습니다.
해마다 피었다 지는 꽃을 나무는 안고 있으면서, 가는 꽃을 아프지 않게 바라보는 자세를 나무는 알고 있었을까요.
당신이 지나간 복도에, 놀빛이 조용히 따라와 오래 흔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