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눈물 2011. 11. 11. 11:28

 

09/02/2011 04:56 am공개조회수 0 0

 




동녘이 밝아오려면 아직 멀었다.

막사의 기상을 알리는 두호(頭號)가 울리기 전이었다.

나는 내 선기대를 깨웠다. 부산히 굴지 말고 급히 무장을 하여 준비하라 일렀다.

조반을 할 수 없으니 평소에 갈무리해둔 비상식량까지 챙기게 했다.


"전하의 원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우리가 앞서 가서 길을 살핀다. 가는 길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곳이 없는지 각별히 살피도록 하여라. 길목 숲이나 산세는 물론 바위틈 하나도 이상하면 즉시 보고하라."


"예!"


"밀행(密行)이다. 허니 입에 재갈을 물고 전마(戰馬)의 목에 건 방울도 떼도록 하라. 은밀히 움직여야 하니 나팔소리도 내지 말 것이며 깃발도 없다. 사이를 두고 넷씩 출발하며 이상한 곳을 발견하거나 주목할 곳이 있으면 주위의 가지를 꺾어서 표시하라. 불측한 무리들을 상대할 일이 벌어지면 관이를 날려 도움을 청하도록!"


"예!"


앞 무리가 출발하였다.

사이를 두고 두 번째 무리도 보내고 나서 나와 함께 가는 기형이 내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병방은 괜찮을까?"


"동보형님이 밤새 붙어 계셨을 터이니・・・・・・"


말끝을 흐리는데 답답한 속은 그도 매 한가지인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하면서 보고를 하려고 병방의 막사로 갔다.

어둠 사이로 한 병사가 물동이를 지고 급히 병방의 막사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부지런한 화병(火兵. 취사병)인가?


막사로 가자 인기척을 듣고 동보가 나왔다.


"좀 어떠신가?"


"아직 기침하지 않으셨네. 상처부위가 호되게 부어올라 열이 나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거든. 이제 막 눈을 붙이셨으니 그냥 출발하게. 자네가 오면 보고할 것 없이 바로 시행하라 이르셨네."


"다녀오겠네. 거둥 다 끝나면 춘당루에 가서 그때 못 푼 회포나 우리끼리 풀어보자. 이 자식은 내버려두고."


"이를 말인가?"


기형의 익살에 동보가 껄껄 웃었다.


물동이를 지고 온 병사가 동이를 내려놓았다.

동보가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맛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는 막사 안 쪽을 설핏 기웃거리다 날카로운 동보의 눈빛에 고개를 쑥 집어넣고 어둠 속으로 총총 사라졌다.


동보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돌아섰다.

조적등(照賊燈. 발밑을 비추는 휴대용 등불)에 비친 병사의 등허리를 보던 기형이 문득 고개를 갸우뚱 하였다.


"서두릅시다. 날이 새기 전에 북암문을 나가야 합니다."


동보에게 눈인사를 하고 막사를 물러났다.

기다리던 병사들과 함께 말에 올라 출발하였다.


어둠 속이라 하여도 성내는 물론 성곽 밖에까지 손바닥 안인 듯 환하였다.

축성을 마치기도 전부터 내 몸인 듯 함께 한 성이다. 각 문의 갯수며 망루 꼭대기 누각에 이르는 길까지 눈을 감고도 한달음에 달려 찾아갈 수 있었다. 나 뿐 아니라 장용영의 모든 병사가 그러할 것이다.


성 안은 문제가 없다. 화성을 나서 진진대(지지대)를 넘어서면서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어둠 속을 응시하며 지금까지 수도 없이 행군을 하며 오갔던 산길이며 다리목을 그려보았다.


북암문을 나와서는 거침없이 달렸다.

조적등으로 살펴 가면서도 먼저 간 선병들의 표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머리가 산기슭에 닿았다.

성곽에 이어지는 선암산은 광교산에서 낮춰 흐르면서 거친 바위덩이가 많다. 화성은 돌로 축조한 성이라 돌 구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화성 돌의 대부분을 파내 온 산이니 아직도 기세도 험하고 여기저기 바위덩이가 밤길을 달리는 바쁜 발을 가로막았다.


조금씩 사위가 밝아오고 있었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산 아래 능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이 지쳐서 계곡 아래 냇가에서 물을 먹이며 잠시 숨을 돌리기로 하였다.


앞서 가던 기형이 말을 세우고 전통을 내렸다. 성질 급한 그답게 개울로 먼저 뛰어 내려가 엎드려 물을 뜨던 기형이 문득 앗! 하고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제야 생각났다! 분명히 그 놈이다. 본 적이 있어!"


"누구 말입니까?"


"화병 말이다. 아까 막사로 물동이를 지고 왔던 놈 생각나느냐?"


"예?"


기형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얼떨떨하여 기억을 되짚어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형이 엎드려 있던 옆 바위틈에서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뒤따라 내려가던 병사가 푹 쓰러졌다.

기형은 자갈이 깔린 풀숲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순간 나는 말에서 날아내려 뛰어갔다.


매화(埋火)다!

수십 개의 나무로 만든 목통 폭약을 땅속에 묻어 연결한 진법에 걸려든 것이다.

아무리 잘 훈련된 말이라도 산길을 달려 내려와 이 즈음에선 반드시 한 번은 쉴 터인즉 거둥을 노리는 누군가가 설치한 것이다.


수십 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진이라 나는 따라 달려온 병사들에게 폭약이 터진 곳부터 구리선이 연결된 장대 끝을 찾으라 하였다.


자갈밭에 떨어진 기형의 몸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형님!"


몸을 가누지 못하며 피거품을 뿜어내던 기형이 입가를 떨며 가늘게 눈을 떴다.


"창아 이 길이 다가 아니다! 위험한 곳은 성 안이다! 서둘러 돌아가거라. 병방에게 알려야 한다. 그 화병은 절대 전하의 곁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시각이 급하다. 그 자와 연결된 놈을 잡아라."


말을 끝내자마자 기형은 혼절하고 말았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듣고 앞서 출발하였던 무리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기형의 몸을 안전한 풀숲으로 옮기고 나는 선병들에게 남은 목통을 전부 찾아 제거하라 명령을 내렸다.


"곧 의병(醫兵)이 올 것이니 그때까지 잘 지켜라. 속히 불러오겠다. 나는 성으로 간다. 너희들의 손에 전하의 옥체가 걸렸다. 첫머리 병사들은 가던 길로 그대로 달려 임무를 완성하고 나와 둘만 성으로 돌아간다. 나머지는 여기서 매복지점을 샅샅이 살피고 부상병을 지켜라."


쓰러진 병사를 살피던 장용위가 나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역도다!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나는 말에 올라 고삐를 채었다.


"이럇!!"


내려오던 산길로 미친 듯이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관이(貫耳)-화살을 죽 꽂아장대 끝에 단 것. 죄인을 효수할때 양쪽 귀에 걸어 조리돌릴때 썼지만병사들의행군시에도 명령신호로 쓰기도 했다.


*사진- 배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