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쌍치도
점점이 은꽃이 날리는 진주홍 명주치마가 부끄럽지 않는 자태다.
동백기름 곱게 발라 귀밑까지 몇 올 흘러내린 잔머리는 그대로 두고, 트레머리 곱게 올려 색색의 칠보 산호 구슬이 흔들리는 뒤꽂이와 백동빗치개로 단장한 여인, 반듯한 콧날에 복숭아처럼 발그스레하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붓하게 절을 하는 기녀는 바로 근적이였다.
나는 혼이 빠진 듯 정신을 놓고 우리 앞에서 날아갈듯 절을 하는 근적이를 바라보았다.
큰 절을 하고 일어서던 근적이 나를 보고 휘청하였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검은 콩을 박은 듯, 깨끗한 눈동자는 여전한데 저 화려한 치장이 어인 말이며 여기 기방에서 너를 보고 있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흔들리던 근적의 얼굴이 이윽고 가라앉았다.
근적이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네, 네가 여길 어떻게・・・・・・"
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적은 눈썹을 내리깔았다.
이렇게 변하였어도 처마선이 떨어지는 듯 검고 긴 눈썹그늘은 여전했다.
어안이 벙벙하여 우리 둘을 살피는 것은 기형과 동보였다.
"영낙없이 뱃속샌님인줄로만 알았더니 벌써부터 우리 모르게 트고 지냈던 사이란 말이야?"
"어찌된 영문이냐?"
나는 고개를 들고 똑바로 근적이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무명저고리에 미투리를 신고 우물가를 종종거리며 다니던 근적이의 복사꽃 같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렇게 단장을 하지 않아도 구겨진 동정으로도 가리지 못하던 뽀얀 목선과 파란 핏줄이 살짝 도드라지던 그 손등이 고왔다.
장독대에 앉아 소꿉놀이를 할 때면 조개껍데기에 흙밥을 든든히 자시라고 듬뿍듬뿍 퍼주던 근적이, 글을 읽을 때 등잔불이 꺼지지 말라고 남모르게 저녁마다 기름을 가득가득 채워두던 이도 근적이었음을 나는 안다. 집을 나오던 날, 두툼하게 솜을 넣은 버선을 봇짐 안에 넣어준 것도 근적이었다.
언제나 잘 웃고 눈물도 많던 근적이.
내 뒤를 종종 따르며 오라비라 불러도 되느냐 물었다가 제 어미에게 들켜서 혼찌검도 났었지.
그 아이가, 그렇게 상냥하고 곱던 아이가 왜 기루에 앉아 손님을 맞고 있는 것인가.
주안상이 들어오고도 나는 내내 말을 잃었다.
처참하게 일그러져 앉아있는 내 표정을 보고 지난한 사이를 짐작하였던지 기형이 끄덕끄덕하였다.
"살면서 기막힌 사연이 어디 없는 사람 있던가. 우리 창이와 이 아이에게 아무래도 곡절이 깊은 듯 하이. 어차피 우리 둘이는 자네 사내 만들어주기로 들어온 것이고 새삼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닌 듯 하이."
"그러게나 말이오. 에잇, 술맛 떨어져버렸어. 이 담엔 자네가 거하게 사게나."
짐짓 너스레를 떨며 앞에 채워진 술잔을 훌쩍 털어마시고는 두 사람은 일어나버렸다.
"돌아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내 계집이 밤새서 나누는 은밀한 정담을 짐작만 하여도 될 것이지 새삼 귀로 확인할 필요가 무어야. 일부러 홀애비 속을 긁자는 수작이 아니라면."
짐짓 껄껄 웃으며 일어서는 기형에게 근적이 일어나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였다.
"이년이 오늘 꿈에도 못 잊던 분을 뵈었기로 인사가 이리 못쓰게 되었습니다. 후일 다시 들러주시면 톡톡히 이 빚을 갚겠습니다."
기름이 흐르는 저 말은 누구의 것인가.
생전 보도 듣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저 말은 정녕 할아버지 댁 마당을 오가던 그 아이가 할 말이 아니다.
기형과 동보가 물러갔다.
나는 술병을 들어 몇 잔을 연거푸 마셔버렸다.
익숙치 않은 술에 목구멍이 타는 듯 해도 도무지 나는 이것이 현실 같지가 않아 믿겨지지 않았다.
몇 잔을 연거푸 들이키자 근적의 손이 내 손에 쥐어진 술병을 잡았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이리 드시면 몸이 상합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비로소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으되 내 눈에는 도무지 낯설고 무섭기만 한 아이.
"네가・・・・・・진정 근적이냐?"
"아닙니다."
도리질을 한다.
그렇지 네가 그 아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잘못 본 것이냐? 닮은 아이일 뿐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그 아이가 맞습니다."
무슨 말이냐・・・・・・
"이곳에 와서 언젠가는 혹여 도련님을 다시 뵐 수 있을까 생각하였지만 이렇게 빨리 뵈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도련님을 그리 따르던 근적이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기생 추연이일 뿐이지요."
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손을 뻗어 근적이의 손을 잡아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맞다. 핏방울이 솟은 내 손을 잡아채 거침없이 빨던 그 손이 맞다.
일 년이 지났던가.
조금 더 흘렀던가.
그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네가 왜 여기서 사내들을 맞고 있는 것이냐.
"할아버지는・・・・・・ 건강하시냐?"
"뵌 지 저도 오래라・・・・・・ 혼인한 아씨를 따라 나오면서 뵌 마지막 모습으로는 여전히 그만하셨습니다."
누이가 혼인을 하였다고!
그새!!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돌덩이가 심장을 거세게 밀어친 듯 아득하였다.
"그 사람이냐?"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예・・・・・・"
"언제・・・・・・?"
"도련님 떠나시고 석 달 쯤 지나서요. 서방님이 규장각 검서관으로 가시면서 미뤄왔던 혼례를 올리셨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정혼이 되어있던 사람들이다.
더우기 오라비와 정혼자가 그리 친밀하고 집안에서 두루 반기던 사람이었으니 더는 미룰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친가사람도 아니요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에게 굳이 소식을 알릴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
새삼 이렇게 가슴이 터지고 아플 일은 아니다. 이미 다 알았던 일 아닌가.
"그런데・・・・・・너는 왜・・・・・・"
근적의 얼굴이 비로소 떨어졌다.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숙이고 있던 입에서 비로소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혼인을 하시고 처음부터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노마님께서 저를 곱게 보지 않으신 게지요.
도무지 그럴 일이 없는데도 서방님이 자꾸 저를 보는 기색이 남다르다고 불편해하셨습니다. 막 시집온 새아씨가 알면 큰일 날 소리라 아씨 앞에서 내색은 하지 않으셨지만 모질게 구박하시고 이미 손이 많은 집에 몸종까지 딸려 보냈냐고 언짢아하셨는데・・・・・・"
어느 날 아침 별당청소를 하러 들어갔다.
방바닥을 닦고 있는데 아침 일찍 등청을 한 서방님이 들어왔다.
무얼 두고 갔던 것인가.
황망하여 얼른 일어서다 휘청하는 것을 서방님이 붙잡아주었다.
무슨 일로 되짚어왔나 의아하여 따라 들어오던 마님께 딱 들키고 말았다.
별스럽지도 않은 일이었건만 핑계를 잡지 못해 안달이던 마님이니 당장 난리가 났다. 종년 처지에 서방님을 넘보고 호리려들었다고 작신 매를 맞고 쫓겨났다.
아씨가 빌었으나 새로 갓 시집온 아씨가 무슨 힘이 있었으랴. 도리 없이 쫓겨오자니 종년신세 집이라고 가봐야 양가에 불편한 일을 만들 뿐이고 헌이도련님 찬바람에 버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어찌어찌하다보니 가진 것은 빈 몸뚱이 뿐, 한양에서 아씨댁 사람들을 볼 일이 무서워 어찌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 말문이 열리지를 않았다.
순간, 내 뇌리에 스치는 것은 우물가에서 근적이를 보던 수현의 눈길이었다.
분명 수현이 근적이를 바라보던 눈길은 고운 계집을 바라보던 사내의 뜨거운 눈빛이었다. 정혼자를 찾아 드나들다 꽃 옆에 또 한 꽃이 눈에 들었던 것일 게다.
어찌 알았던 그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눈치 빠른 어머니에게 들켜버렸으니 새 사람 들이고 집안 시끄러워질까 염려하여 두 말도 못하게 답삭 꼬리를 잡아 내쳐버린 것이다.
그가 그런 사내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수현은 내 기억 속에서 반듯하고 맑던 사람이었다.
꽃 같고 달 같은 운정누이의 짝으로 더없을 짝이었다.
아니 그런 여인을 두고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상상도 못하였다.
그저 내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던 것처럼 그도 느닷없는 그 아이의 행동에 놀랐던 것이라 생각했다.
누이는 그럼・・・・・・ 자매처럼 함께 크고 시집까지 따라온 근적이를, 다른 이유도 아닌 갓 혼인한 새서방님을 홀렸다 하여 쫓아내고 그 집에서 어찌 지낼 것인가. 막막한 속을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기막힌 마음을 누구라 붙잡고 풀어볼 것인가.
근적이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병 바닥에 고인 술을 따라 벌컥 들이마시고 나는 근적이의 흔들리는 어깨를 잡았다.
* 그림 김득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