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길었던 하루였다.
휴가랍시고 엉뚱한 일을 맡아 피곤했다.
게다가 생각도 않은 세연씨까지 불쑥 나타나고...
그래도 뭐 그럭저럭 좋았네.
누군가 나를 보고 싶어서, 이 먼 곳까지 불쑥 찾아온다는게 기분이 좋기도 했고
그 사람이 썩 괜찮은 사람이라 더 좋기도 했고...
아직은 모르겠다 어떻게 될 지.
그래도 느낌도 나쁘지 않고 말도 잘 통할 것 같아.
구김살 없는 사람이다. 부모돈으로 태평하게 백수를 즐기는 것 같아 그게 좀 걸리지만
그래도 아무 생각없이 놀고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뭐 어때, 부모재산도 능력이라는데.
솔직히 윤미주, 너 살짝 흔들린 것도 사실이잖아.
따지고 보면 그렇게 괜찮아보이는 남자가 하필 나를 찍었다니 기분이 썩 나쁜 건 아니잖아.
여기까지만 생각하자.
혼자 너무 나가지 말고...
뭐야 이 인간.
남의 평화까지 방해하고!
거 할 일 없으면 좀 일찍일찍 잠이나 주무시지?
늦게까지 퍼질러 자다가 세수도 못하고 주사맞지 말고.
혹시 내가 마시는 커피가 탐이 나서?
다 나을 때까지 커피는 꿈도 꾸지 마요.
물론 이후로도 내 커피는 절대 안 주겠지만.
몸에 안 좋은 커피라고?
나 같으면 몸에 칼 안 맞고 커피 꿀떡꿀떡 마시겠네.
만수무강에는 암튼 이게 더 낫지.
찔렸지?
메롱이다~!
한 모금이라도 주나봐라.
그러게 평소에 이쁜 짓 좀 해보지.
아이고 맛있어, 오늘따라 커피가 아주 입에 짝짝 붙네 붙어.
그치가 여행가잡니까?
그치? 뭔치?
갈치? 꽁치?
아 세연씨...
눈치는 암튼...
그치라뇨?
누구보고 그치래.
그쪽보단 백만배는 낫겠네.
우이쒸... 이걸 왜 들고 나왔대...
근데 왜 내가 이 사람 앞에서 공짜표 보고 앉았는게 챙피하냐.
이 사람이 뭔데...
쌍팔년도 수법?
뭐야 지금 비웃는 거?
남이사 여행을 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자기가.
말도 참 이쁘게 해대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입만 열면 열받게 하더니 갑자기 조용해지니 그것도 불편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버지랑 예배실 안에서 무슨 말인가를 한참 주고 받는 걸 보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봐도 그림이 맞지 않는 두 남자가 그렇게 소근거릴 얘기가 없을텐데 말이다.
아니 내가 그게 왜 궁금해. 웃긴다 웃겨...
하나도 안 궁금해~!
커피맛 조옿고~ 모닥불도 따뜻하고...
섬이라서 그런지 밤공기가 벌써 선듯하다.
이런 모닥불에는 군밤을 해먹으면 딱인데 말이다.
언제 밤 좀 사다가 구워먹어볼까...
아 뭐얼?
뭐가 궁금해서 그렇게 자꾸 힐끔거리는데?
커피, 먹고 싶으셔 정말?
치사하다 치사해.
세상에서 제일 드러운게 남 먹는 거 쳐다보는 거랬는데.
그냥 한 잔 타줄 걸 그랬나...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뜸을 들이더니 뜬금없이 불쑥 한다는 소리가
"그 양 말입니다."
양? 무슨 양? 김양? 박양?
길 잃은 어린 양 말입니다.
아 걔...
걔가 왜요?
어떻게 됩니까?
뭐가 어떻게 되요?
찾습니까?
당연하죠.
하나님은요 울타리 안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보다 길 잃은 한 마리를 더 사랑하시거든요.
그건 차별 아닙니까?
그렇게 사랑하면 처음부터 잃어버리지를 말던가.
아.. 그야...
그러게. 하나님은 왜 괜히 잃어버리셔셔 말을 궁하게 만드시나 글쎄.
잘 좀 보고 계시지.
처음에 그랬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그랬죠.
왜요,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나를 사랑하시는데... 왜 고아로 만드셨을까요...
말문이 막혔다.
그랬구나...
이 사람... 고아였구나...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사람이 그를 키워준 고아원 원장, 양아버지였단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어린 저 사람의 마음에 이토록 깊은 생채기를 남겼을까.
연자맷돌을 메고 바다에 빠질 벌을...그 어린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내 동생들은 생물학적 부모는 물론 따로 있지만 이 사람의 상처와 같은 것은 없으리라.
아니, 아주 단정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렇지 않도록 아빠와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왔다.
한순간도 그 아이들이 내 동생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니었구나...
거침없이 쏟아지는 무서운 말들.
처음으로 들었다.
이 사람의 가슴 깊이 응어리진 이야기
말이 없고 늘 화가 나 있는 것만 같던 이 남자.
우리 아이들을 보며 아주 짧은 미소를 잠깐 보여주었지만 내내 얼음장같이 싸늘하고 매섭던 남자.
이 사람의 가슴에는 이토록 큰 상처가 있었구나...
그리고 그는 내내 말이 없었다.
불꽃이 사그라드는 모닥불을 가끔 뒤적이며 그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사위어드는 불꽃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이 사람이 아주 외로워보였다.
가진 게 아주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정말은 아주아주 가난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토록 굳은 얼굴을 가졌구나.
어쩌면 그 가난하고 외로운 마음을 감추려고 그렇게 단단한 척 했구나...
어쩐지 나는 이 사람의 빛깔이 내가 갖고 있는 그 무엇과 조금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잘은 모르지만 말이다.
밤이 깊도록 그는 말이 없었다.
커피가 다 식어버렸는데도 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서늘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