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완결소설- 꽃 필 때, 꽃 질 때
마지막 회
소금눈물
2011. 11. 10. 15:20
스물 네 살의 여름은 너무나 길었다.
도대체 끝이 보일 것 같지가 않았다. 비는 시시때때로 쏟아졌다.
서양인형의 이름을 단 태풍이 서너 개씩 지나갔고 TV를 켜면 해운대 방파제로 쏟아지는 거친 파도를 언제나 볼 수 있었다.
창 밖으로 손을 뻗으면 손가락 사이로 물기가 배어날 것처럼 언제나 대기는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이 지루한 외지에 지쳐 있었고 운지는 언제나 졸리고 피곤했다.
명숙언니가 사전을 베끼는 속도만 날마다 빨라졌을 뿐이었다.
운지의 죽음은 모두가 예견하고는 있었지만 그 모습은 뜻밖으로 다가왔다.
독한 항암제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십대에 발병했던 그 병은 의사가 애초에 진단한 것보다는 시간을 조금 더 넘기고 있었다.
삼십 오 킬로까지 야위었던 운지는 그날 따라 무슨 바람에선지 제대로 추스릴 수 없을 만큼 부실한 몸으로 외출을 했다.
입원했던 병원에서도 운지의 외출을 몰랐다고 했다.
해운대의 병원에서 전화를 했다.
보호자란에는 명숙언니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운지가 절에서 자랐다는 걸 입원하기 직전에야 알았다.
운지는 동백섬에 혼자 갔다가 승용차에 치었다.
몸이약한 운지는 달려오는 차를 빨리 피할 수 없었을 테고, 이상하게도 달려오는 차를 그대로 멈추어 선 채 바라보기만 했다고 했다.
운지를 친 사람은 얼이 빠져 있었다.
운지의 몸은 ㄱ자로 꺾어져 있었다.
팔을 억지로 비틀어 놓은 헝겊인형 같았다.
속을 채운 솜이며 헝겊조각들을 함부로 뜯어낸 것처럼 운지의 몸은 형편없게 부서졌다.
운지의 시신은 영안실에서 나흘을 묵었다.
뒤늦게 수소문 끝에 운지를 키웠던 절의 스님을 찾아 화장장으로 갔다.
초라하고 쓸쓸한 영구였다.
육 년만에 부산에 처음으로 눈이 내린 날 나는 부산을 떠났다.
운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해가 바뀌고 있었다.
"어젯밤에 과수원을 거니는 꿈을 꾸었어. 환하게 배꽃이 피어 있었어. 비 처럼 꽃잎이 흩날리는 배나무 사이로 나는 걸어갔어. 작은 종 처럼 꽃들이 소리를 내는 거야. 잘그랑잘그랑 하고. 그 소리가 그렇게 좋더구나. 꽃들이 꿈 속에서 몸을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말야. 그 꽃들이 피려고 그랬나봐. 우리가 모르는 새, 꽃은 그렇게 종소리를 내며 피었다 지는 가 보지"
명숙언니는 가끔씩 이런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백엽상 아래서 쓴 편지는 햇살이 묻어 있었다.
갸름하고 날씬한 언니의 글씨는 햇살에 모서리를 찧은 듯 둥글었다.
언니는 끝내 그의 소식을 묻지 않는다.
나도 그의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그가 방금 닦은 차창으로 파란 아크릴 액자에 끼워진 그의 사진과 우리 딸의 사진이 보인다.
시드는 목련 꽃봉지 사이로 그의 얼굴이 언뜻 비춰진다.
무심하고 단정한 얼굴이다.
종소리의 잔상이 가만히 가슴에 와 닿는다.
아무 감동도 설레임도 없는 그 소리는 텅 빈 해변의 모습이다.
바랜 봄 빛이 뜰에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