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눈물 2011. 11. 10. 15:12

01/02/2004 04:06 pm공개조회수 0 0


뿌리도 없이 막연하게 목을 짓눌러 오던 그 두려움과 불안의 정체는 가장 가혹하게 다가왔다.

한밤중에 울린 전화, 영이였다.

"오빠 안녕.....안녕..."

단 한마디였다.

목이 졸린 사람처럼, 이어지 못하고 갈라진 음성,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듯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한기가 느껴졌다. 처음 듣는 사람의 음색이었다.

창이 수화기에 대고 비명처럼 영의 이름을 불러대도, 영은 대답이 없었다.
신음인지, 한숨인지 짐승의 숨소리처럼 건네오던 그 소리는 .....그리고 이내 끊어졌다.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던 창이, 퍼뜩 퉁겨 일어나 광주로 달렸다.
무슨 정신이었을까...무슨 생각이 스쳐갔을까.

자신이 생각하고 떠올리는 게 제발 아니기를...그런 일은 제발 없기를....내내 창은 스스로가 하는 생각을 저주하고 공포스러하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그 집에 도착했을 때.

미친듯이 두드려대는 현관문을....조용히 열어주던 영이의 얼굴.

함부로 흩어진 머리채...창이 그토록이나 기꺼워하며 아끼던 그 머릿결.
쓰다듬기조차 아까와 차마 안고 가만가만 쓸어보던 영의 그 머리채....

눈물인지 공포엔지 질려서 뚫려버린 공허한 눈동자.
창을 바라보면서도 창의 뒤에 버티고 선 벽을 향해 던지는 듯한 그 텅 빈 시선.

헝겊인형처럼 아무 의지도 없이 매달린 두 팔....허수아비가 서 있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듯이 간신히 서 있는 그 유령같은 모습.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소매와 치맛자락....얼굴에 튄 핏방울..

창은 경악했다.

그리고 보아버렸다.

그녀의 찢어진 잠옷자락을...
거친 손이 함부로 할퀴고 지나간 검붉은 상흔이 남은 그녀의 맨 살을....

창은 눈을 감고.....주저 앉았다.

터져오르는 분노보다, 온몸을 휘감고 흔들어대는 그 아픔보다....창은 자신에 대한 혐오와 저주와, 절망감에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주저 앉아 있던 창이, 짐승처럼 포효하며 거실로 박차고 들어갔을 때, 창은 아직도 멎지 않는 팔뚝의 피를 손으로 막으며 방에서 나오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조형가!!!!!"

창은 온 몸을 던져 그에게로 날아가 주먹을 내질렀다.
퍽~! 함부로 돌아간 그의 얼굴, 휘청 쓰러지는 몸에 걸려서 거실의 장식이 와르르 무너졌다.
창은 미친듯이 조검사의 몸을 짓밟고 후려쳤다.
그의 주먹이 지나는 곳마다 비명처럼 창의 고함이 먼저 달려갔다.

미친 듯이 부여잡는 영의 손을 뿌리치고 그에게 주먹을 날리고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거친 폭풍우처럼 달려들던 창은, 뒤따라 달려온 영에게 온 몸을 잡혔다.

"오빠 이러지마..이러지 마 오빠....오빠 제발..."

흐느끼는 영의 울음에 맥이 풀린 창이 내지르던 주먹을 멈추었다.
눈 앞이 캄캄해져 왔다.
무릎을 꺾고 주저 앉았다.

"네 놈이군. 네가 왜 왔어. 여기가 어디라고. 그래...보았군. 이젠 알겠지. 네 놈만 아니면 아무 문제가 없었어. 어차피 너와 나는 공존할 수가 없는 사람들 아닌가.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덤벼 봐. 덤벼보라구. 나를 쳐 봐. 네 여자라면 그렇게라도 지켰어야지. 이 바보같은 놈~!"

영에게 잡혀 버둥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창에게 차갑게 던지는 말이었다.
그의 목소리도 갈라지고 터져 있었다.
입 안에서 우물거리는 듯, 똑바로 분절되지 못하고 이어지는 한숨같기도 하고,울음같기도 한 말들.

"네 놈 때문이야. 네 놈 때문이야!"

"저 아이는....저 아이는...네 누이가 아니었니...네 놈이 그토록 찾던 하나밖에 없는 그 누이가 아니었니?"

"누이?"

그가 조소처럼 날렸다.

"누이이기 전에, 내게도 한 번의 사랑이었지. 내게도 목숨처럼 지키고 싶던 사랑이었지. 하늘이 막는 다면 그 하늘도 베고 싶은 그 사랑이었다는 말이다. 네 놈이 뭘 알겠어. 너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데, 저 아이의 몸이든, 마음이든 무엇이나 다 가지고 용서를 받을 수 있는데. 왜 나는 안된다는 거지? 그렇게는 못하겠어.
누가 정한 법이란 말이냐? 어찌 처음부터 있던 법이고 어느 놈이 정한 법이란 말이냐? 그 법은 내가 세우겠다. 내가 지키겠다!
그래...저 아이의 마음은 갖지 못한다고 치자. 그래, 몸이 없는 마음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너희들은 모르겠지. 몸을 가지지 못하고 남은 마음이 얼마나 빈 껍데기인지 너희는 모르겠지.
그래 몸을 젖혀두고 그 마음만 가지고 얼마든지 불러봐라. 얼마나 갈 수 있는 게 몸 없는 마음인지 두고 보마..너희들이 그렇게 목 매는 사랑이라는 게, 그 힘이 어떤 건지 내가 두고 보마.
하지만, 그 마음은 너희들에게 주겠다만, 그 몸이라도 나는 가져야겠군. 그게 공평치 않겠나? 어차피 둘은 다 가질 수 없을테니 말이야."

거대한 동굴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말이었다.

"너는 미쳤어. 네 놈이 저지른 일을 어떻게 용서받는다는 말이냐. 어떻게 저 아이에게..."

"용서? 구하지도 않은 용서를 누구에게 받지? 아니지....아니지...내가 왜 그 용서를 구해야 하지? 어차피 받지 못할 용서라면 바라지도 않겠어. 네놈이 무얼 알겠어. 너는 지금까지 저 애의 지난 생을 다 가졌으니 나는 앞으로의 생을 가져야겠어. 절대로 내게서 도망치지 못해. 내가 원한 것을 갖지 못한 것이 없었어. 나를 막는 것이라면 나는 어떤 것도 베어왔어. 단 하나...단 하나...저 아이만은...
하지만 나도 내가 원하고 얻을 수 있는 경계는 알아. 저 아이...아마 죽을 때까지 나를 용서 못하겠지. 나를 사랑하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
하지만 말야.....절대로 나를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내게 묶여서 한번 몸부림을 쳐 봐. 나를 지금까지 그렇게도 힘들게 했고 저주했으니 이제 감당하면서 견뎌 봐. 나는 너희들을 편안하게 놓아 줄 수가 없어"

"네 놈은 미쳤어!"

"미쳤지. 아...그래 나는 미쳤어. 부모를 잃고 얼굴도 제대로 못 본 핏덩이 동생을 잃은 줄도 모르고 살았지.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아갔을때 그땐 너희들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어. 내가 가지지 못하고 그토록이나 간절하게 원했던 그 모든 것이 네겐 있었어. 저 아이조차....저 아이조차...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이를 쳐다보는 것처럼 나를 보고...피하더군...네 놈에게로 말야. 네 놈 등 뒤로 말야.

나는 미쳤다구. 너를 망가뜨리기 위해, 네 놈이 가진 것을 다 부수기 위해서, 그래서 의지할 데라곤 천지에 나 밖에 없으면 저 아이가 내게로 올 줄알았지.

마음? 그래 그것은 갖지 못한다고 치자. 하지만 내가 가질 수 있던 것이 또 무엇이었지?

어리석군 서백창...내겐 너무나 익숙한 감정이야. 나는 내게 없는 것으로 가난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야.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보고 가난한 걸 느끼는 인간이야!"

그리고 창은 보았다.
그가 쥐고 있는 것을. 무섭도록 낮아지고 싸늘해진 그의 음성이 창의 귓가를 벗어나기도 전에 서서히 쳐들리던 손에 들린 그 것을.

그리고 미쳐 피하기도 전에 먼저 자신의 몸 위로 쓰러지며 덮쳐오는 영의 몸을.
사태를 파악할 시간도 없이.....부드럽게 피부를 파고드는 그 파열음, 몸의 어디쯤을 뚫고 들어가다 닿는 가. 드드득.... 돌아가는 그 칼날의 비웃음을...
무너지는 영의 몸이 창을 덮었을 때, 경악한 조형가의 동공이 그대로 확대되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