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눈물 2011. 11. 10. 15:01

12/30/2003 10:33 am공개조회수 0 2


세상의 슬픔들은 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
세상의 기쁨들은 다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내 기쁨은 오빠가 가져오고, 내 슬픔 또한 오빠가 가져온다.
그가 나를 보는 눈길에 내가 떨리고, 그 눈길이 비껴가는 곳에 내 그림자가 있다.


오빠는....내 곁을 이제 떠난다.
오빠는 모르겠지. 오빠가 돌아올 때는 내가 없다는 걸. 오빠를 떠나야 그사람의 미움이 이 집에서 벗어난다. 나는 이 집의 딸로 자랐지만 딸이 아니었다.
오빠를 사랑하기 위해서 내가 일어서야 한다. 내가....떠나야 한다.
아무 슬픔없이 일어설 수 있을까. 내 무릎이 꺾이지 않을까. 내 발이 땅에 붙지 않을까.
내가 눈에서 멀어지면 오빠의 마음에서도 지워질까.

그렇게 해줘 오빠. 나를 잊어줘. 나를 버려줘.
오빠의 귀여운 누이로 나를 잊어줘.
오빠가 나를 아파한다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거야. 오빠가 나 때문에 힘들어지는 건 정말 견딜 수 없어. 나를 잊어줘. 나를 사랑했듯이, 그렇게 나를 잊어줘.
오빠 옆에 있으면, 이 집에 있으면 그사람을 배신하는 거래. 가족은 같이 살아야 하는 거래. 그리고 나는 조가래. 나는 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래. 같은 성(姓)이 아니어서 오빠를 품을 수 있었지만, 같은 성이 아니어서 오빠를 떠나야 한대.

내가 하는 인사는 잊어줘.
나를 기억해줄까.
아주 먼 시간 뒤쪽에서 만난다 해도 그때도 저렇게 슬픈 얼굴로 나를 안아줄까.
안녕, 내 사람. 내 기쁨이었던 사람, 그리고 내 슬픔이 된 사람.
소리없이 어둠속에서 전하는 내 눈물의 인사를...오빠 기억치 말아줘.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을거야...

안녕, 안녕 그대.
내 모든 것.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 그대....창...


오빠가 꿈에 보였다.
눈송이처럼 흰 꽃이 내리는 언덕길에 오빠와 내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일까.
내 눈은 젖어있고 오빠는 나를 하염없이 슬픈 표정으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가 아팠던가. 꿈에서도 나는 가슴이 저렸다.

오빠가 있는 배경으로 하염없이 꽃눈은 지고, 꽃눈은 지고....
내 볼을 만지는 오빠의 손길이 따뜻하다. 오빠는 내 눈길을 자기의 지문에 새기는 것처럼 천천히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내 마음의 지도를 그 손에 새기듯이. 나는 눈을 감았다. 소리없이 흐르는 눈물. 그가 알까...이 마음을 알까. 차마 아프다 못하는 이 마음을 그가 알까...

오빠는 저만치서 걸어가고 나는 오빠의 뒤를 따랐다. 그의 길다란 그림자가 천천히 나를 덮었다. 그 그늘 아래서 딛는 내 발밑으로도 눈꽃이 흐르고 흘러 가만히 그에게 닿았다. 내 마음의 길이 그에게 닿듯이....

깨어보니 세상은 아직도 어둠이다. 배개가 온통 젖어 있었다.
잘 있을까....잘 있겠지.
나는 오빠에게 소식을 전할수 없다. 오빠를 부르는 순간, 오빠의 이름을 흰 봉투에 적는 순간, 내 마음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 것 같다.
오빠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차마 감추지 못하고 이 마음이 그대로 터질것만 같다.
창....차마 부르지 못하고 뻗지 못하는 내 마음을....아는지...그대 아는지...


- 절절하게 창을 그리워하던 영의 일기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극심한 자기분노와 혐오, 자학. 때로는 광기같은 불안이 서리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있지 말아야 할 존재였다. 나 때문에 모두가 불행해졌다. 내 친부모도, 그리고 양부모도, 오빠도, 오빠조차도 나때문에 불행해 질것이다.

왜 살아있니...
나는 어둠속에서 중얼거린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선 채 나를 들여다보는 어둠 속의 존재.
나는 그에게 맹렬하게 소리친다. 너는 왜 살아있는 거니, 왜 살아 있는 거니.

어떤 나라에선, 오누이끼리, 숙질간에 결혼을 한대. 다른 피붙이들은 그들간에 끈끈하게 이어진 길을 절대로 끊지 못한대. 신라시대 왕가에선 한 가족끼리만 결혼하고 살았대.

오빠. 내 얼굴을 긁어버리고 싶어. 내가 아랑이라고 했어? 내가 아랑이었어?
얼굴을 긁어버리면 도미를 만날 수 있는 거야? 그러면 오빠를 찾아나설 수가 있는 거야?

나는 살아있지 말아야 할 존재였다.



-- 그리고 끝이었다.

빈 공간을 남겨둔 채 영이의 일기는 갑자기 끊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창을 다시 만나게 되는 교통 사고 이전까지 절절하게 창을 그리워하고 아파하던 영이는 이후에 일기를 쓰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차마....더는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남은 여백속에 남은 것은 어쩌면 창에게도 보이지 못했을 상처였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 청년을 향해 맹렬하게 타오르던 이 한없이 순수하고 아름답던 소녀의 열정이, 왜 갑자기 이런 분노와 자학으로 변해버리고 만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