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눈물 2011. 11. 10. 14:49

12/26/2003 08:49 am공개조회수 0 2




오빠는 요즘 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다.
종종 술냄새도 난다.
오빠가 늦는 날엔 삼촌도 잠을 못 주무시고 기다리신다. 그런데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내가 물컵을 들고 들어가면 오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잠이 들어있다. 오빠가 많이 야위었다.나는, 나 같은 것은 오빠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오빠의 세상은 나와는 너무 멀다.

오빠에게 여자친구가 생긴 것일까.어젯밤에 오빠를 찾는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예뻣다.
그런 것일까. 대학생이니까 그렇겠지. 미대면 예쁘고 세련된 여자들도 많겠지.오빠는 그 여자와 어떤 사이일까?
창이 있냐고 물었다. 창이라니. 누가 함부로 부르라고 지은 이름인가? 흥. 보나마나 머리도 되게 나쁘고 못생겼을 것이다. 오빠가 그런 여자와 친구일 리가 없다. 또 전화하면 없다고 할거다.

완연한 봄이다. 나도 이제 이학년이다.
키도 우리반에서 제일 크다.
오빠와는 아직도 팔 하나만큼은 차이가 나지만 부지런히 커야지.

"영이 이젠 너무 늦게 다니지마라. 늦는 날에는 오빠에게 마중나와달라고 말해"
외삼촌이 말씀하셨다.

그래, 서백창 제발 마중 좀 나와라. 내가 이렇게 예쁜데 걱정도 안되니? 무슨 오빠가 그러니?

오빠네 학교가 무기한으로 쉰단다. 부럽다. 다음주에는 중간고사다. 왜 중학교는 쉬지 않는 걸까? 대학이 쉬면 고등학교, 중학교도 쉬어야지.공평하지 않다. 대학교만 쉬면 대학에 가려고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은 뭐하러 공부를 하고, 고등학교에 가려고 공부하는 중학생은 뭐하는 건가? 다들 생각들이 없다 어른들은.

시험이 다 끝났다.
그럭저럭이었다. 나는 그다지 머리가 좋지 못한 것 같다. 오빠가 잘하는 미술도 나는 재주가 없다. 성적도 신통찮을 것 같다.
내 짝 은희를 이번에는 꼭 이기고 싶었는데, 은희는 늘 일등을 도맡아 놓는다. 너무 뛰어난 친구가 짝이라는 것은 정말 불편하고 속상한 일이다. 그렇지만 은희는 오빠가 그려준 내 그림을 보고 몹시 부러워했다.
흥~! 우리 오빠 같은 사람이 또 있는 줄 아니? 우리 오빠는 정말....배우보다 멋지다. 목소리도 오빠보다 더 멋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일등을 못해도, 그림을 잘 못그려도, 오빠가 내게 있으니 나는 은희를 부러워하지 않을거야.

과일을 가지고 오빠 방에 들어가니 책을 보고 있었다.

"무슨 책이야?"
"심심해서....역사책좀 들여다 보고 있어"
"역사책? 좀 봐봐"
"백제사야.그런데 참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뭔데?"
"백제 개루왕은 호색한 임금이었단다. 그런데 나라에서 가장 예쁘다는 아랑이라는 여인의 이름을 들었지.
아랑에게는 목수인 도미라는 남편이 있었어. 왕은 도미를 불러서 내기를 했어. 왕이 아내를 유혹해서 성공하면 그에게 큰 상을 내린다고 했단다.
그런데 도미는 자기의 아내는 절대로 다른 남자에게 흔들릴리가 없다고 했지. 왕은 시험을 했겠지? 좋은 옷을 입고 찾아가서 아랑과 동침을 했는데 사실은 아랑이 아니고 몸종이었단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왕이 화가 나서 도미의 눈을 빼고 추방을 했지. 그 다음에 아랑을 다시 불렀더니, 아랑이 말하기를 전에는 남편이 있는 몸이라 왕이라 할지라도 외간 사내이니 몸을 허락할 순 없었지만 이제 남편이 없으니 왕의 분부대로 하노라고 했지.
왕이야 신났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아랑이, 마음을 허락했으니 잠시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했어. 달거리 핑계를 대서 말야. 처음엔 의심하던 왕도 하도 조르니 넘어갔다는 구나.
며칠을 살갑게 굴고 왕의 의심을 벗어나자 아랑은 도망을 쳤어. 그리곤 이 얼굴로 인해 남편의 눈을 멀게 했다고 스스로 얼굴을 긁어서 추녀로 만들어버렸단다.
천하에 끔찍한 추녀가 된 아랑은 거지로 떠돌다가 결국 도미를 만나서 고구려로 도망쳐 살았단다"

"에에~ 거짓말. 아무리 이뻐도 유부년데?"

오빠는 잠잠히 웃었다.

"그래서 오빠는 느낀 게 뭔데?"

"너무 이쁜 아내를 둔 도미가 참 힘들었겠다! 우리 영이를 데려갈 남자도 힘들겠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기분은 솔직히 참 좋았다.

"정말? 오빠, 내가 예뻐? 아랑처럼?"

"아랑보다 더 예쁘지. 어떤 놈이 우리 영이 데려간다면 못 줄거 같애"

"나도 오빠랑 살고 싶어"

오빠는 가만히 손을 뻗어서 내 볼을 만졌다. 말없이 한참을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고 이상해졌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오빠가 굳었던 얼굴을 천천히 풀었다.

오빠는 내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우리 영이, 오빠 옆에 언제까지 있을 거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오빠를 떠날 날이 있을까... 그날이 그예 올까...

오빠는 내 마음을 알까...

"도미같은 사람을 뺏긴다면, 나도 얼굴을 긁어버릴래...."

도미같은 오빠를 뺏긴다면....나는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오빠는 금새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빠...나도 두려워. 오빠를 떠날 날이 나도 두려워. 내가 가지 못하게 해줘. 그사람이 나를 데려가지 못하게 나를 잡아줘. 내가 오빠 옆에 설 수 있을때까지만 기다려줘.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오빠는 내 등을 가만가만 쓸어주었다. 오빠의 품이 어쩐지 낯설었다. 오빠는 오래 말이 없었다.그러다 문득 그런 말을 했다.

"아랑이 너무 예뻐서, 도미는 아랑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을거야. 아랑을 만나고부턴 아랑을 잃을 것이 너무 두려웠을거야...."

오빠 목소리가 너무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