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눈물 2011. 11. 10. 14:38

12/25/2003 03:45 pm공개조회수 0 1



영의 병세는 다행이 빠르게 호전되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혈구 수치도 정상으로 내려가고, 열도 가라앉았다.
혈당도 안정이 되어서 몸무게도 좀 늘었다. 아침 저녁으로 쉽게 저혈당으로 떨어지는 일도 없어졌다.

영이 좋아지고 혼자 거동이 가능해지자 창이 지리산으로 내려갔다.
입원비도 만만찮을 것이었고 뜻밖에도 일정이 길어졌으니 준비할 것도 생겼을 것이었다.

일부러 영의 병실에 들르지는 않았지만 병훈이 전하는 말은 그대로 귀에 박혔다.
"형, 그 환자 되게 이쁘더라. 레지던트들 사이에서 소문이 났어. 아흐~ 그 오빠만 아니라면 어찌 해보는건데."
"잔소리말고 환자 케어나 잘해.실없는 소리하다 망신당하지 말고"
"어쩌다가 젊은 여자가 몸이 그 지경이 되었냐. 그런데 형은 그사람들을 어떻게 알았어?"
"너 방사선과에 갔다왔어? CT 필름 아직도 안챙겨놓은 거야?"
"아이씨.....내가 아직도 인턴으로 보이냐?"
정강이를 걷어채인 병훈이 투덜거렸다.

간간 여전히 실없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누구보다 영이의 몸을 잘 챙겼고 조금만 이상이 와도 꼬박꼬박 소식을 전해주었다. 담당의는 아니었지만 내 눈은 언제나 영이에게 가 있었고 내색은 안해도 그녀도 내가 신경을 쓰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영이 내려간지 이틀이 지났다.
폐암에 걸려 허덕이던 노인을, 마침내 가야 할 곳으로 보내고 늘어진 몸을 스테이션에 구겨놓고 있을 때였다.
저녁내내 씨름하고, 환자보호자에서 졸지에 상주들이 되어버린 이들을 도닥이고....너무나 피곤했다.

누군가 내가 엎어져 있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힘겹게 눈을 떠보니 맑게 웃고 있는 영이였다.
"너무 지치셨나봐요. 선생님 한잔 드시겠어요?"
헝클어진 머리를 멋적게 쓸어넘기며 고쳐앉는 내 앞에 영이, 따뜻한 차가 담긴 컵을 내밀었다.
"좋은 차는 다기도 알맞아야 하는데...."

살풋한 향이 났다.
나는 차마 마시기가 아까워서 두 손으로 감싸쥐었다.그녀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나를 보고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가슴 안쪽에서 무엇인가 울컥하고 솟아 올랐다.

"돌아가셨나 봐요"
어수선하게 통곡소리가 나는 병실쪽을 바라보던 영이 말했다.

"네.준비는 했겠지만 그래도 다들 죽음 앞에서는 똑같아지는 것 같아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건데 왜 다들 무너지지 않겠어요. 발밑이 사라지겠지요"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쓸쓸하게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아차 싶었다. 그러나 당황한 나와는 달리 그녀는 무심하리만큼 맑은 얼굴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가지런히 묶은 머리가 이상하게도 환자복과 잘 어울렸다.
갑자기 침이 마르는 것 같았다.

나는 차를 들이마셨다. 녹차 특유의 담담하고 쌉쌀한 향이 났다.

"어떻게 이런 차를...."
"오빠가 가져왔어요."
"네...그런데 언제 오십니까? 아무래도 병원에 혼자 계시니 좀 불안하실것 같은데."
"제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면 올텐데요. 아마는 발 하나쯤은 여기 병원 현관에 묶어놓고 가셨을 걸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이 웃음이었구나. 그날 본 것이.
한 치, 한 푼도 어긋나지 않을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이런 웃음을 갖게 한 것이었구나.

그럴테지. 창은 발 하나쯤은 여기에 걸치고 갔을 것이다.
발이 끄는대로 또 정신없이 영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그런 창을 알기에 영이는 견디는 거구나.
창이 달려오고 있음을 알기에 혼자라도 무섭지 않고, 죽음이 손님처럼 드나드는 병원에서도 저렇게 차맛을 내는 거구나....

"쉬세요. 그만 일어날께요"
내가 컵을 내려놓기를 기다린 것처럼 이윽고 그녀가 일어섰다.
나는 황망하게 일어나서 잘 마셨노라고 서둘러 인사했다.

버들가지처럼 여위고 그림자가 서늘한 여인이었지만, 정녕 뒷태가 고왔다.
한줌으로 잡힐까 싶게 여려보이면서도 누구도 쉽게 범접치 못할 위엄까지 갖추고 있었다.
저 여인이 예전에 태어났다면, 수틀에 꽃이나 나비를 새길 여염규수가 아니라, 사내가 쓰는 칼이 쥐어진다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입 안에 감도는 차향을 생각하다 문득 나는 내 서랍속에 넣어둔 그녀의 노트가 생각이 났다.

내내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려줄 시기는 이미 놓쳐버렸고 그렇다고 그녀의 노트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감춰두고 있을수만은 없었다.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처녀가 흔히 들고 다니는 그런 소소한 수첩이었다면 죄책감이 덜할지도 모르겠지만 차마 들여다보아서는 안될 것이라면, 그런 것을 내가 감추고 있다면.

나는 망연히 영이 사라진 병실을 바라보았다.
어쨋든 서둘러 확인을 해야 하겠지. 늦어서라도 돌려줄수 있으면 그리하고.

일과가 끝나고 저녁회진을 마친 다음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가운을 벗어 구석에 처박고 담배를 꺼내들었다.

별거 없을 것이다. 전화번호집이나, 기껏해야 연애시가 몇편 적인, 어린 여자의 그저그런 다이어리려니...나는 그리 마음먹었다.

서랍을 열었다.
노트는 안쪽에 그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