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눈물 2011. 11. 10. 14:27

12/24/2003 05:18 am공개조회수 0 0


어느 여름날이었던가.
창이 하고 다니는 일을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영이를 데리고 여름 방학을 지리산에서 보내고 오라고 시켰다. 격렬해져가는 학생운동에 아들이 다칠까도 걱정이었고, 발길이 잦아진 영의 오빠로부터 영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창은 영과 함께 지리산으로 내려갔다.
어머니의 사촌 오빠가 지리산의 작은 암자의 주지였다.
왔느냐. 그래 그동안 잘 쉬었느냐. 조심해서 올라가거라. 오며 가며 그게 전부이던 말. 눈빛이 형형하던 스님.

노동현장으로, 수배중인 몸으로....치열하게 사는 친구들과 떨어져서 도망쳤다는 괴로움도 잠시, 창은 지리산의 그 여름이 참으로 좋았다.
일찍 새 소리에 눈을 떠서 물안개가 밀려올라오는 산등성이를 보는 것도 좋았다. 이슬이 걷히지 않는 오솔길에서 발등을 넘어오는 풀잎에 함뿍 젖어보는 일도 좋았다.
허리를 묻는 관목 숲에서 잽싸게 달아나는 어린 짐승을 살피는 일도 도시에서는 맛보지 못한 즐거움이었다.
영이가 냇가 아래쪽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까르르 웃어대면, 적막하던 숲속에서 눈부신 은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물수제비를 뜨는 창의 옆에서 조약돌을 골라주며 먼저 즐거워했다.

세상은 저만큼 기억의 아래에 내려가 있었고, 고단한 민중도, 아픈 영이의 과거도 모두 사라지고 천지엔 하늘을 가리는 온통 시퍼런 녹음과 이제 막 피어나는 영과 그 영을......이제 막 보게 된 창이 있을 뿐이었다.

어찌 그 인연이 시작되었던가. 어찌 그 마음이 들어왔던가. 다만 한 개 꽃이던 아이가 어쩌자고 아픈 별이 되어 그의 가슴에 박혀버렸던가.



물비늘이 은빛으로 반짝이던 오후였다.
간밤에 내린 비로 계곡물은 좀 불어 있었다. 산중에서 물이 불어있다는 것은 위험을 말했다. 유속이 완만하고 물 밑에 큰 바위가 없는 하류에 비해, 계곡의 상류는 작은 비에도 급격하게 물흐름이 달라졌고 칼날같은 날카로운 바위가 언제나 물 밑에 도사리고 있었다.

영 아까부터 저쪽 기슭에 앉아서 무엇에 정신을 팔렸는지 물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물빛이 영의 얼굴에 물그림을 만들었다. 일렁이는 물빛이 얼굴에 부딛쳐 환하게 흔들렸다.
창은 그런 영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잠깐씩 뜻모를 미소가 영의 입가를 흘러갈때마다 창은 홀린듯이 손짓을 빠르게 했다.

영이의 흰 목덜미로 작은 나뭇가지가 자꾸만 닿아서 영은 연신 걷어내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얀 팔뚝이 나뭇가지를 걷어 내느라 곧게 뻗을 때마다 영이의 긴 머리채가 앞 가슴으로 떨어졌고, 부풀기 시작한 앞섶이 고개를 돌릴때마다 조금 더 도드라졌다가 가라앉곤 했다.

순간, 창은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들고 있던 붓을 떨어뜨렸다.

저 아이, 저 아이가 맞았던가.
귀엽고, 애틋하던 그 어린 누이가, 그 아이가 맞는가.

까치밥 열매처럼 귀엽고 초롱초롱하던 아이가, 어느새 물기를 머금은 함박꽃처럼 피어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 아이를 벗고 조금씩 여자의 냄새를 풍기면서 창에게 다가와 있었다. 자기가 퍼뜨리는 향기를, 그 스스로는 미처 알지도 못하면서 그 향기를 무기로 휘두르는 악동 같았다.

그래서였던가.
언제부턴지 이제는 예전처럼 창은 서슴없이 영이를 안고 한바퀴 도는 일도 없었고, 누이의 방으로 들어갈 때도 문을 벌컥벌컥 여는 일도 삼가게 되었다.
영이도 돌아온 오빠의 품으로 뛰어들지 않았고, 잠자는 오빠의 이불속으로 함부로 파고드는 일도 이제는 없었다.

그렇게 자라버렸던 것이다. 그들 스스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일이었지만.

혼란스런 머리를 흔들고 정신을 차려서 막 붓을 물감에 적셨을 때였다.

"오빠~!"
날카로운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퍼뜩 고개를 들어 건너편 물가를 바라보았다. 영이 물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창은 반사적으로 물로 뛰어들었다. 거리는 먼것이 아니었지만 물 속은 깊었다.
불어버린 물이 소를 이루어 소용돌이가 치는 깊은 곳으로 빠진 영이를 막 건져서 들어올렸을 때였다.
창은 강하게 가슴을 찔러오는 통증에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 와중에 늘어진 영을 기슭으로 떠밀고 창은 몸을 기슭 바위에 걸친 채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