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시정부 청사
이번 여행의 마지막은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돌아보기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現 노신공원) 기념관을 돌아보고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발길을 상해 임시정부 청사로 옮깁니다.
저는 임시정부는 상해에 한 곳만 설치 된 줄 알았는데, 상해에만 네 곳이 있었고 일제의 압박을 피해 중국 각지를 돌며 계속 이동하며 훨씬 많이 설치되었었더군요.
이곳은 유일하게 남은 청사로, 비좁은 골목에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얼핏 스쳐 지나쳐도 모를 만큼 퇴락한 3층짜리 건물이었습니다.
이곳에 들르기 직전, 홍구공원에서 매헌 윤봉길의사의 거사를 설명하던 가이드 말씀이, 일본이 조선을 삼키고 중국을 위협하며 침략해 들어오던 그 때, 분노와 좌절감이 치를 떨면서도 중국의 그 거대한 인구 누구 하나도 일본군 대장에게 폭탄을 던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답니다.
머나먼 이국에서 홀홀단신 건너온 스물 다섯살 청년이 홍구공원의 일본 천장절 기념식장에서 시라카와대장에게 폭탄을 던진 순간, 전 중국과 중국에 와 있던 서구 열강이 깨어났고 감동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장렬한 조선의 항일투쟁에 감동한 중국정부가 임시정부에 지원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매헌과 백범의 만남이 있었던 임시정부 청사.
들어가면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현지 중국인들에게야 날마다 밀어닥치는 한국인의 행렬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겠지요.
그들에겐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한 조그만 집에서 얼마나 커다랗고 위대한 꿈이 피와 땀으로 피어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을까요.
사실은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있습니다.
중국인 공안원이 막는 것을 눈길을 피해서 도둑촬영입니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선 사진을 찍지 말아야 하겠지만, 여기 깃든 이 숭고한 정신들을 널리 알리고픈 마음을, 선열들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건물 내부는 몹시 단촐하고 비좁습니다.
보안을 위해서 정부의 각 청사 별로 따로 은거지가 있었다고 하지요.
그러니까 여기는 그 지휘부 같은 곳이겠지요.
저 태극기는 그때 독립군들이 쓰던 태극기랍니다.
초대 임시정부 수반이셨던 분들의 초상이군요.
박은식 선생과... 아 석주 이상룡 선생의 초상이 보입니다.
석주 이상룡...
안동의 양대 항일명문집안 고성이씨와 의성김씨 가문 중의 항일투쟁 최고 어르신.
그 고래등 같은 엄청난 집안과 재물, 모든 명예를 다 버리시고 나라가 망했는데 신주야 무엇이겠느냐며 오백 년간 내려오던 신주를 다 땅에 묻어버리시고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켜 준 뒤, 뒤를 따르는 40세대를 이끌고 서간도로 오셨습니다.
이후 항일무장투쟁의 모체가 되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시고 이곳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역임하셨지요.
석주선생의 삼대 장자가 모두 독립운동으로 돌아가셨고 이 집안에만 독립지사를 아홉분을 배출하셨다니 과연 대단한 명문이지요?
망명객으로 떠돌면서도 이 집안의 철저한 전통, 가산을 모두 쓸어내버리더라도 자손의 교육에는 등한히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내내 받들어서 며느님의 교육도 직접 시키셨다 합니다.
큰할아버지 석주선생은 간도로 넘어가 투쟁하시고 조국에 남으신 분들은 군자금으로 지원하시다가 일제에 미움을 받아 그 분들의 종택, 안동 임청각 한가운데로 철길을 내버렸다고 합니다.
교육방송의 도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서간도의 바람 부는 임청각>이 있으니 이 때 당시 선열들의 눈물겨운 독립운동사가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당신들이 누대로 누리던 부유한 집안의 안위와 누대의 명예를 다 져버리고 이국의 황량한 땅에서 망명객으로 떠돌때 그 마음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고통스러웠을까요.
오늘날 이 분들이 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이 분들이 그 때 그토록 피를 흘리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셨던 것을 여기 중국사람들은 아직도 다 기억하고 생생하게 이야기 한다.
한국 사람들이, 사업을 와서, 관광을 와서, 떳떳하게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 조상들을 훌륭한 일을 이 곳 사람들이 기억하고 다 존경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가이드의 말이 스쳐갑니다.
그 때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습니다.
몇몇이 앉기에도 좁은 공간이었으니까요.
이렇게 요강을 들여놓고 화장실로 썼습니다.
하기야... 이 분들이 쓰신 경비가 어떤 돈이었던가요.
조국에서, 머나먼 하와이 수수밭에서, 집안을 무너뜨리며, 목숨을 위협당하며 어렵게 보내준 그 눈물의 군자금이 아니었던가요.
부엌입니다.
의자가 몇 개 있지만 식탁이 참 좁습니다.
변변한 식사라도 하시며 싸우셨던 걸까...
따뜻한 온기를 대하기도 전에 몸을 피하고 황급히 떠나야했던 적은 얼마나 많았을까... 목이 메입니다.
백범 선생의 집무실입니다.
좁은 책상에 가족사진이 하나 놓여있었고 왼쪽 서기 앞의 장 너머로 일인용 침대가 있는데 그곳이 주무시는 곳이었습니다.
저 전화는 얼마나 급하고 위험한 소식들을 날라다 주었을까...
쫓기던 독립군 중 누가 피습을 당했다는 소식을 전했을까, 지난 번에 내린 비밀지령을 무사히 완수했다는 소식이 들린 날도 있겠지...
전화기를 보면서 소리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왼쪽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글씨입니다.
안창호씨... 라고 누군가 말했다지요?
참...할 말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이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으며 시작합니다.
대한민국의 수장이 되겠다 꿈꾸는 이가 하는 말이 기가 막힐 뿐입니다.
손님들이 묵어가던 침상입니다.
좁지만 그래도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더군요.
어느 누가 무지한 마음에 무례하게 부른다 해도,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사는 그야말로 피의 역사였습니다.
이 마음을 누가 짐작할까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된 이 곳이 헐리게 되자 가산을 정리한 거금을 들고 와서 사들인 매헌의 며느님.
이런 분들의 마음이 계신 곳입니다.
"관광"을 위해 상해에 오시더라도, 한국인이라면 잊지말고 꼭 이 작은 집을 들러보시라고 권해드립니다.
그것이 그분들이 그 명예와 부요를 다 버리고 압록강을 눈보라속에 가솔을 이끌고 건너시던 그 기막함, 이 강물이 언젠가는 다 마르더라도 이 한만은 마르지 않으리라던 그 기막힘을 위로해드리는 유일한 길이요 우리가 오늘날 잊지 말고 간직해야 하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