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톤레삽" 크메르어로 '신선한 큰물'이라는 뜻으로 건기 때와 우기 때의 풍경이 다르다. 캄보디아는 11월부터 1월까지는 건기지만 간간이 비가 오는 시원한 계절이다. 그러나 2월부터는 4월까진는 비가 거의 없는 바짝 마른 건기다. 이때는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날씨는 덥다. 그래서 호수의 수위가 낮아진다. 이때 호수에 가면 바짝 마른 느낌이 든다. 호수도 별로 넓지 않고 주변 풍경도 삭막하다. 호수 주변에 낡은 오두막집들이 보이는데 빈민촌을 보는 것 같아서 낭만도 별로 없고 삭막하기만 하다. 반면 우기인 5월에서 10월은 인도양에서불어오는 바람이 엄청난 폭우를 동반한다. 대개 오전에는 오지 않고 오후에 갑자기 한바탕 쏟아붓다가 그치거나 밤새 오는 경우도 있다.
건기 때는 3천 제곱킬로미터 정도인 호수의 규모가 우기 때는 1만 제곱 킬로미터에 육박해서 세 배로넓어진다. (이지상지음 <혼돈의 캄보디아, 불멸의 앙코르와트> 중에서)
책에도 나와있지만 보통 우기 때는 오후 쯤에 스콜처럼 우다다 내리고 그친다는데 여기에도 기상이변이 와서 하루종일 내리는 일이 잦아졌단다. 이 날도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오전이 다 가도록 도무지 그치질 않고 내리 폭우다. 덕분에 도로가 엉망이 되어 온통 흙탕물 투성이다. 가는 도중에 길 가에 보이는 집들을 보니 캄보디아의 민가 모습이 제대로 보인다. 온통 황토진창길가에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 어설픈 기둥과 갈대인지 대나무인지 대충 지어진 듯한 집, 집 앞마다 빗물을 모아담는 커다란 항아리가 있고 하나같이 남루한 풍경들, 빗속에서 여인들은 젖은 옷을 가릴 생각도 못하고 총총 길을 가고 아이들은 벗은 채 놀고 있다.
톤레삽에 도착했을 때는 진창길이 완전히 뻘처럼 변해 있어서 신은 신발에 비닐봉지를 씌웠다. 샌들을 신고가서 다행이다. 우산을 똑바로 펴들 수도 없이 비는 사정없이 들이치는데 버스가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몰려오는 아이들. 찬 비에 옷은 이미 다 젖었고 비옷도 우산도 당연 없다. 낡은 옷 사이로 속살이 다 들여다보이는데 추위에 이를 딱딱 부딪치며 덜덜 떨면서 원달러! 원달러!를 외친다. 너무 배가 고파보여서 차 안에서 먹던 과자봉지를 넘겨주었다. 허겁지겁 받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이런 아이들은 ... 어디엘 가든 너무나 많다.
일률적으로 가이드에게 배 이용료를 넘겨서 얼마나 지불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우기라 호수가 불어있는데 이 톤레삽호수는 동양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데 캄보디아 어획량의 60%를 생산한단다. 어종도 850여 종에 이른단다.
이 물에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 건기가 되면 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이 사람들의 삶은 고단해지지만 우기가 되어 호수에 물이 넘치면 그들은 풍요로와진다. 이 물을 떠나서 그들은 살 수가 없다. 마시고 씻고 빨래하고 아이를 낳고 가축을 기르고..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학교란다.
배와 배를 이어붙여 이웃이 되었다. 큰 방 하나에 대를 이어 모두 한 가족이 그렇게 산다.
빗속을 저어가는 부부.
무엇을 삶는지 찌는지 화덕 위에 그릇이 있고 여인은 큰 장대로 연신 저으며 불을 피우고 있었다. 배 위에서 불을 피운다는 게 참 신기했다.
한국의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 수상가옥 중에서 제일 번듯해보인다.
저 작은 조각배를 아이들 다섯이 타고 해맑게 웃으며 놀고 있다. 배에서 손을 흔드는 우리에게 인사를 하는 표정이 천진하다. 배의 생활이 일상이니 이 거대한 물결 위에서 저 작은 배를 타고 가면서도 전혀 무섭지 않나보다. 차라리 재미있는 놀이처럼 보인다.
망망한 호수. 호수라기보다 바다처럼 보인다. 이 호수를 배를 타고 가려면 이런 모터가 달린 유람선으로도 여섯시간을 가야 저 쪽 끝에 닿는단다. 참말로 엄청난 크기다.
시야에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는 거대한 황토빛의 바다.
해먹 위에 아이를 올리고 쉬고 있는 엄마의 표정이 참 평화롭다.
땅을 딛지 않는 주거는 생각도 못하겠는데 물결에 흔들리는 배집을 갖고도 그들은 이 작고 소박한 집을 꽃을 가꾸며 치장을 하고 그렇게 행복을 찾으며 살아간다.
수업시간인가보다. 율동을 하며 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잡은 고기를 털며 그물을 손질하는 부부들. 그들의 옷차림이나 집이나 모습이 너무 비슷하다. 하지만 가난해보인다고 해서 그들의 내면까지 힘겨울거라는 생각은 오만이겠지. 그들에겐 그렇게 날마다 어제 같고 오늘 같은 삶이다.
이 호수의 수상가옥들 중에서는 학교도 관공서도 상점도 물론 모두 다 있다. 하지만 이렇게 수상가옥들 사이들을 오가며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전쟁 때 캄보디아로 피난을 와서 돌아가지 못한 난민들이라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
호수 기슭의 아이. 몹시 추웠는데 덜덜 떨면서 저렇게 놀고 있었다.
생각보다 수심은 그리 깊지 않단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 보는 눈은 안스러운데 아이의 얼굴은 도리어 평안하다. 흙탕물 속을 건너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수재가 나서 위험한 물길을 헤치고 집을 찾아가는 것 같다.
배에서 선장의 잔심부름을 하던 아이. 위험한 뱃머리에서, 비에 젖어 미끄러울텐데 쉴 새 없이 오가며 차일을 들추고 내리고 하던 아이는 손님들이 배에서 오르내릴 때도 한국말로 "머리 조심하세요" 해서 깜짝 놀래켰다. 속살이 다 드러나보이는 입성...무엇이라도 주고 싶은데 당장 가진 게 없다. 조용히 제 일을 묵묵히 하는 이 소년과 유적지에서 원 달라!를 외치던 아이들. 마음이 착잡하다.
수상가옥촌을 지나노라니 젊은이들이 노는 당구장도 보이고 카드놀이하는 모습도 보인다. 어디든,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은 육지든 호수 위에서든 그 삶의 모습은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유독 이 호숫가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나갈 수가 없어 그 삶이 팍팍하다.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회지(!)인 씨엠립으로 나가보지만 거기서도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다시 고향인 톤레삽으로 돌아온단다. 우기에는 물고기를 잡아 팔지만 점점 어족이 줄어들고 있다니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마음이 무겁다.
배와 배를 연결해서 이웃을 만들었는데, 그 출렁거리는 배에서 다른 배로 이동하는 것도 못할 것 같은데 이곳 아이들은 너무나 익숙하게 촐랑촐랑 잘도 넘어다닌다. 저 대야는 아이가 물 위에서 타고노는 놀이기구 같은 것이다. 저렇게 일찌감치부터 물에 익숙해지고 그 물에서 살다보니 다들 수영은 기가 막히게 잘 한다. 하기야 물이 그들의 삶의 터전이니.
무엇을 도와달라는 말이었을까.
배에서 내려 진창길에 올라서니 아이들이 몰려들어 여행자의 얼굴 하나하나씩을 확인하고 잽싸게 달려온다. 아까 배에 오를 때는 전혀 몰랐는데 그새 관광객들 사진을 찍어 접시에 인화해 그것을 파는 것이다. 포즈를 제대로 잡은 것이 아니니 보나마나 사진은 우스꽝스럽지만 제법 잘 나왔다. 접시 한 장에 삼천 원. 흥정은 노! 안 산다고 고개를 저으면 옷자락을 잡고 놔주질 않는다. 쓰리 달러! 쓰리 달러! 를 외치며. 내 얼굴이 새겨져 있으니 저 접시를 사지 않으면 그 접시는 쓸모없는 것이 되겠지. 쓸모는 없지만 사줄 수 밖에 없다. 상술 치고는 기가 막힌다. 어느새 찍은 걸까.
내가 지갑을 열자 금새 환하게 웃던 아이는 사진기를 꺼내는 내 앞에 잽싸게 저렇게 포즈를 취해주었다. 추위에 떨면서도 브이자를 그리던 아이의 프로정신. 참말로 절로 감탄이 나온다. 그런데 어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 비가 오는 날, 해먹에서 낮잠을 자고, 카드놀이를 하는데 그들의 아이들이 이렇게 외국인 여행자들을 따라붙으며 돈을 번다. 아마도 이 아이들의 돈은 그 집의 수입 대부분이 되기도 할 것이다.
내가 준 돈과 과자봉지를 들고 환하게 웃던 아이. 아마도 그 아이는 날마다 몰려오는 한국의 관광객들 중 하나로 나를 기억할 일도 없겠지만 이 아이의 검게 빛나는 눈동자는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톤레삽의 이 아이는 이전 유적지의 구걸하던 아이들과는 다르다. 가난하지만 자긍을 읽지 않는 당당한 표정. 노동의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지 결코 구걸은 아니라는 듯한 눈빛.
바다처럼 넘실대던 톤레삽의 호수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추위속에서 떨고 있던 이 아이의 미소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