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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1)

소금눈물 2011. 11. 7. 21:42

06/28/2007 04:56 pm




정조의 통치이념이 크게 보아 사민(士民) 통합에 있다고는 하지만, 특히 민(民)에 대한 배려가 비상하였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민국(民國)'의 이익을 강조하였으며, 민인(民人)의 의지를 정치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군사(君師)를 자처하는 것도, 민인을 위한 정치가 극대화되었다고 믿어지는 중국 삼대(三代)의 이상적 군주상(理想的 君主像)을 빌어오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 그러므로 정조의 왕권강화와 유교적 이상정치의 추구는 결국 민인을 위한 권력구조를 세우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양반사회의 학문수준과 일반 백성들의 민도가 높아진 시기의 정치지도력은 물리적 통제로써만은 확립되기 어렵다. 그야말로 세련된 문치(文治)가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80


정조의 왕권강화 정책은 여러 각도로 추진되었다. 즉위 직후 궁 안에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새로운 문한기구(文翰機構)를 설치하여 종전의 문한기능과 비서실의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강력한 친위문신세력을 양성하고 이를 개혁정치의 선도적 중심기구로 활용하였다. 재위 5년 이후에는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에 의해 기성관료들을 재교육시켰다.


(초계문신:
정조가 즉위 직후 규장각를 설립한 것은 역대 국왕 및 본인의 영정과 저술, 친필 등을 보관한다는 점을 표방하였지만, 정치적으로 세력 기반을 강화하고 문화적으로는 이념과 정책의 연구를 진흥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 구체적인 장치로서, 재능 있고 젊은 인물들을 의정부에서 선발해 국왕에게 보고[抄啓]한 후 규장각에 소속시켜 학문을 연마하게 한 것이다.

이 제도는 조선 전기의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며, 운영 방식은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에 규정되어 있다. 37세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선발하여 본래 직무를 면제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되, 1개월에 2회의 구술고사[講]와 1회의 필답고사[製]로 성과를 평가하였다. 정조가 친히 강론에 참여하거나 직접 시험을 보여 채점하기도 하였다. 교육과 연구의 내용은 물론 유학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문장 형식이나 공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경전의 참뜻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40세가 되면 졸업시켜 익힌 바를 국정에 적용하게 하였다.

1781년(정조 5)부터 1800년까지 10차에 걸쳐 138인이 선발되었고 세도정치하에서 중단되었다가, 헌종이 정조를 모델로 국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던 중 1847년(헌종 13)과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56인을 선발한 바 있으나 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정조 때에는 정약용(丁若鏞)·홍석주(洪奭周)·김재찬(金載瓚) 등 당대 최고의 학자와 관료들을 배출하여 그들이 19세기의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였다. 《초계문신제명록(抄啓文臣題名錄)》에 전체 명단이 정리되어 있다.


네이버 자료 인용)

p. 81


군대의 장악도 왕권강화의 필수적인 요건이다. 정조는 재위 9년 이후로 군대개혁에 착수하였다. 장용영(壯勇營)의 설치는 그 핵심사업이었다. 조선후기 중앙기간부대였던 5군영은 붕당정치가 치열해지면서 각 당파의 이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점차 정치적 군대로 변질되어 갔다.
정치자금도 군영에서 조달되는 경우가 많았다.정조는 이러한 중앙 5군영의 기간부대들을 대폭 축소시키고, 장용영이라는 새로운 친위부대를 창설하여 5군영 산하의 군대를 배속시켰다. 문신 장악으로 시작된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은 군대의 장악을 통해 완결을 보게 된 것이다.
장용영 중에서도 화성(華城)에 설치한 장용영 외영(外營)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외관상으로는 이곳에 있는 아버지의 선침(仙寢, 무덤)을 지킨다는 명분을 건 것이지만, 실제로는 국왕 정조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는 친위부대였다. 원래 장용영은 정조 9년 (1785)에 정조의 친위부대로 설치된 장용위애서 비롯된 것인데, 정조 17년(1793)에 장용영의 지방부대인 외영을 수원에 설치하게 된 것이다.

p 84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 한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