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庶孼斷想 (2)

소금눈물 2011. 11. 7. 21:37

03/08/2007 03:44 pm

나는 <조선일보>의 지면에서 드라나는 광신적 반공주의와 거기에 기초한 사상 검열 취향, 국가 상징물에 대한 강박증적 집착과 이따금씩 보이는 전쟁 불사(不辭) 노선으로 보아, 이 신문이 분명히 일종의 극우 신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듯, 이 신문이 순수한 극우 신문은 아니다. 이 신문은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이념적 순결성을 포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 신문이 궁극적으로 숭배하는 것은 극우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권력과 돈이고, 때때로 극우 이데올로기는 권력과 돈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강준만이 안보 상업주의라고 표현한, 먹성 좋고 파렴치한 약탈 자본주의. 수렵 자본주의가 이 신문의 편집 원리다. 이 수렵 자본주의는 때때로 자유주의나 좌파 이데올로기에 미소를 짓기도 한다. 그 자유주의나 좌파 이데올로기에 환금성(換金性)이 있다면, 그리고 그 어색한 미소가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거나 보위하는 데 필요불가결하다면.

p. 98-99


임지현이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집단주의적 에토스의 심리적 기반 가운데 하나는 - 비록 그것이 그 기반의 사소한 일부일 뿐이기는 하겠지만 - 그런 인정에 대한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권력에 대한 의지와 분리돼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은 가장 세련된 형태의 권력 의지일 뿐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나 의지의 최소 형태 또는 가장 소극적인 형태는 적어도 주류에 속하고 싶다는 욕망, 주류에 속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그 욕망이나 의지의 배면에는 소외나 배제에 대한 소박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p. 100


내가 사숙하는 스승 복거일은 어느 자리에서 " 어떤 이념을 내세우는 글이 다른 이념들을 따르는 이들을 설득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미 설득된 이들을 설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말한 바 있지만, '어떤 이념을 내세우는 글'이 아니더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특히 개인적 이해관계가 개입돼 있을 때, 스므 살 넘은 사람을 설득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지적으로 설득하는 일도 어렵지만 정서적으로 설득하는 일은 더 어렵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설득되기 전에는 , 지적으로도 충분히 설득되지 않는다.


p. 101


칠순의 소설가 박완서에서 40대의 평론가 정과리에 이르기까지 이번에 (동인문학상)종신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일곱 사람의 문인들은 한국 문단에서 적지 않은 힘과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다. <조선일보>는 자사가 운영하는 문학상의 종신 심사위원직을 이들에게 위촉함으로써, 자사의 확실한 종신 협력자들을 문단 안에서 확보한 셈이다.


p. 107


<조선일보>는 위대하다! 이건 비아냥이 아니다. 나는 이 신문의 응변(應辯)과 원모(遠謀), 그 탁발한 병법(兵法) 앞에서 경배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말이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자면, 최근 <조선일보>의 서평난은 외부 필자들의 글의 비중을 점점 더 높이고 있다. 외부 필자들의 풀(pool)을 확대하는 것이 이 신문의 최근 방책인 듯 하다. 그것은 <조선일보>협력자들을 늘림으로써 비판자들을 고립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p. 108


그러나 김우창이 이성과 합리성의 위험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성이 권력 의지의 표현이고, 이성과 합리성이 힘의 장(場)에서 투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성을 하나의 갈등 과정에서 생겨나는 보편성의 확대 궤적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그의 이성은 반성하는 이성이다. 그가 말하는 이성의 원리는 단순한 실증적 원리가 아니라 자기 비판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원리다. 그의 합리성은 합리성의 테두리 바깥에 존재하는 도덕적, 미적 지혜들을 껴안을 수 있는 오지랖 넓은 합리성이다. 그 이성은 오늘의 사유를 역사의 사유에 일치시킬 줄 아는 개인적 공감의 능력과 또 그것을 넘어가는 보편적 사유의 능력이고, '오늘의 시점에서 자기 반성적으로 정화된 코기토'다.

반성하는 이성!!

p. 108


자유의 존재 근거는 질서라는 것. 한국 사회에 정말 부족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질서라는 것. 그 질서의 다른 이름은 규칙일 것이다. 최소한의 보편적 규칙. 자유의 거푸집으로서의 규칙.

p. 110


그러나 위에서도 비쳤듯 그 말이 은유적으로 쓰일 때 적서(嫡庶)라는 개념은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 말은 다수파와 소수파, 중심과 변두리라는 의미를 담으면서 한 사회의 풍경을 그리는 데 적절한 틀이 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집단과 개인이라는 함의를 지닌다. 집단으로서의 적(嫡)과 개인으로서의 서(庶) 말이다. 집단이라는 추상 앞에서 개인이라는 구체는 언제나 서자다.


p. 127


손호철이 어느 자리에서 분별없이 - 나는 '유치하게'라거나 '야비하게'라고 쓸까 하다가 분별을 되찾아 '분별없이' 라고 쓴다 - 빈정거렸듯, '(학교에서 자리잡아야 먹고살 수 있는 좌파와는 달리) 우파나 자유주의자들은 프리랜서로도 먹고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니까 말이다. 한국의 우파. 참 짐이 무겁다.


내가 고종석을 이렇게 좋아하는 이유기도 하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 이런 야유와 골계에 포복졸도한다.

p. 167


위기에 빠진 것은 한국의 인문학이 아니라 한국의 인문학자 종사자라는, 즉 그 위기는 인문학 종사자들의 '몫'과 관련돼 있다는 일각의 비아냥거림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한국의 인문학이 지금 위기를 이야기할 만큼 가멸진 과거를 지닌 적이 있었던가? 위기에 빠진 인문학 종사자가 '인문학의 위기' 담론을 퍼뜨리며 내세우는 논리는 흔히 자가당착에 이른다. 예컨대 잘 알려진 평론가 한 사람은 이런 취지로 말한다. : "인문학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돈과 관련시킨단 말인가? 그런데, 앞으로는 이 인문학적 감수성이 있어야 돈을 벌 수 있다." 인문학은 황금 너머에 있지만, 한편 그것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기도 하다는 것이다. 정말, 한국의 인문학 종사자들, 위기에 처한 게 확실하다.)


p. 175


실상 한국 사회는 극우파가 앞에서 이끌고 낡은 좌파의 일부가 뒤에서 밀어주며 굴러가는 사회다. 이 극우파와 낡은 좌파는 흔히 서로를 욕한다. 그러나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된다는 것을. 서로가 동류라는 것을. 그들은 둘 다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들은 적어도 그렇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의 유토피아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 질서를 전제한다. 이 기존 이데올로기 질서의 두 축 가운데 하나인 낡은 좌파는 때때로 소위 캐비어 좌파이기도 하다. 그들은 널따란 응접실에서 동류 인텔리와 함께 프르미에 크뤼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상상 속의 문화혁명기를 그리워하고 밀림 속의 게릴라를 찬양한다. 그들이 친화감을 느끼는 프롤레타리아는 그들 관념 속의 위대한 노동자 계급이지, 현실 속의 나약하고 비루한 노동자 개개인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프로그램은 아직도 웅장하다. 이 낡은 좌파와 극우파는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정치적 사안에 따라 흔히 힘을 합한다. 나는 그들의 연합을 깨고 우파의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라고 발언하고 싶다.

문득 어떤 블로거가 생각난다.
나무낭과 내가 "운동"을 목걸이로 삼고 다닌다고 비아냥댔던.
그리고 까마득히 지나간 어떤 시절의 인물군(群)도. 혁명이라는 보통명사가 그리고 유치찬란한 휘장, 아니 호피무늬를 가진 나이롱뽕이었던 걸 알게 했던 이들 말이다
.


p. 177

그는 이 사막에서 너무 외로워
이따금 뒤로 걸었다
자기 앞에서 발자국을 보기 위해서

빠리 지하철 1호선 전동차 안에 붙어있는 어떤 시민의 시.
이 사막에서 너무 외로워 이따금 뒤로 걸었다... 자기 앞에서 발자국을 보기 위해서-
이 시를 보고 견딜 수 없이 외로워졌다.


p. 191


고종석 <개마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