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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소금눈물 2011. 11. 7. 21:25

01/08/2007 10:28 am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흰 바람벽이 있어


맞다.
그는 이렇게 천상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지어진 사람이다.
그런 시인이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서럽고 쓸쓸해지는 이야기들.
슬픔이 다만 값없는 애상이 아니라 세상에 나와 오도카니 저 바람소리 가득한 마을을 내다보는 쓸쓸함.
참말로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똑 이렇게 살게 생겨진 것만 같은.

먼 북방의 중국인 마을에서 오르는 저녁밥 짓는 냄새, 그리고 아랫녘 항구에서 때없이 눈물을 보이는 나이든 천희에 이르기까지,
머루와 강아지와 별빛과 덕있게 수굿한 노인의원에 이르기까지
그 텁텁하고 눅진한 오래된 땀냄새 같은 정겨움, 그 정겨움이 주는 이상하게 허우룩한 쓸쓸함...

몇 번이나 앞으로 가서 그 따뜻하고 소중한 것들의 나지막한 이야기를 듣고
다시 뒤로 가서 낯선 땅으로 팔려가는 어린 계집아이의 부르튼 손등을 본다.

하늘이 가장 귀해한 사람도 아니언만
왜 이렇게 쓸쓸하고 눈물겨운 것들이 눈에 마음에 차들어 오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