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소금눈물의 그림편지

2018년 3월 1일 간송미술관 <바람을 그리다 -혜원신원복과 겸재 정선 展>

소금눈물 2018. 3. 1. 20:11




내가 가장 자주 가면서 가장 사랑하는 곳이라면 아마도 <간송>이지 않을까.

그 중에서 <혜원>전이 열리면 고민할 것도 없이 나서게 된다.

간송은 늘 진리이지만 그 중에서도 혜원, 단원은 언제나 아름다움, 언제나 최고이다.


이때쯤 간송 전이 열릴만 한데... 하고 뒤지다 역시나!!

때마침 3.1절 공휴일이고 곧바로 기차표를 예매했다.


이번 전시는 <바람을 그리다 -혜원 신윤복과 겸재 정선 展>이다.

혜원과 겸재라니, 언뜻 생각하면 좀 이질적일 수 있는 조합이나, 그 앞에 '바람'이 주제로 잡혔다면 그럴 법 하겠다.


우리말의 '바람'은 여러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대기의 흐름도 바람이요, 뜻을 이룸을 기대하는 마음도 바람이요, 사람들의 마음에 춘정이 들어 설레는 것도 바람이다.

하늘 아래 너른 자연의 품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그려갔던 겸재의 화폭에 담긴 것도 바람이었고, 붉은 치맛자락을 하늘높이 들어올린 단옷날의 그네도 바람이었고, 청상의 과부가 매화꽃 그늘 아래서 짝도 없이 혼자서 농탕이는 속을 달랬던 것도 바람이었다.


대체로 나는 요즘 유행하기 시작하는 미디어아트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쪽이다.

바래고 상한 화폭이나 원화의 감동을 더듬어 찾아보고 싶어하는 까닭이다.

그래도 혜원인데, 그래도 단오풍정이 나올텐데 미디어아트도 나쁘지많은 않겠다 생각했는데- 내 섣부른 오산이고 편견이었다.


이번 전시 기획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박수받아 마땅한 기획이었고 관람자로서도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경험이었다.




전시관을 들어가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단오풍정- 그네의 여주인공을 따로 놓았다.

샛노랑 저고리와 빨란 치맛자락의 극적인 대비, 젊음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여인, 이제 막 탁 떠뜨린 꽃의 눈부심 같은 자태, 그런 색감이지 않은가.


이 옆으로는 혜원의 화첩에 등장하는 이들의 옷맵시를  실제로 재현하였다.

이는  화폭 밖으로 걸어나온 그들의 색감을 통해 혜원이 집요하게 추구했던 조선의 색, 그 색을 따라갔던 혜원의 붓을 더듬어보게 한다.

흰 저고리와  옅은 녹두빛 모시 치마를 보자니, 지금의 우리 눈엔 이런 담청의 색감은 노인의 한복으로 주로 그려지겠지만 진실로는 젊은 여자의 옷이 아닐까 싶다. 한껏 뽐내지 않고 한 톤 내리고 감추면서 본연이 가진 아름다움을 은은히 드러내고 즐길 줄 알았던, 혜원의 달빛 같은 아름다움 바로 그런 것처럼.


 



크게 이 주제로 혜원의 그림들을 따라가 본다.



선명한 색감, 아름다운 등장인물들의 묘사, 동적인 관람자들과 악공들 사이에서 마치 무예를 겨루는 듯한 두 여인의 커다란 움직임이 대비를 이루는 이 그림은 혜원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이 그림을 맨 처음 보면 구도상으로는 참 무지막지한 구도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그런데 찬찬히 들여다보다보면 혜원은 참으로 영리하기 짝이 없다.

 

화폭을 대놓고  관람자의 시선으로 보기에 가로로는  三의 구도로 보이지만 세로선을 긋고 보면  한 중간의 무희를 기준으로 왼쪽 관람자들과 오른쪽 무희와 담뱃대를 들고 서 있는 시종의 구도로 나뉜다.


신분의 층하로 보자면 위에서 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三자의 구도이이며 이 수평적인 구도는 본디 정적인 구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정적이지 않다. 윗자리에 앉은 이들의 무게감과 대조해 아래쪽 악공들의 몸피는 작다. 역삼각형 꼴이다. 수평의 시선으로 두었으면서도 위에서 양감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동적인 구도가 된다.

 

세로의 구도로 보자.  정중앙의 기녀를 기준으로  왼쪽에 자리한 사람은 열 명이다. 오른쪽은 여섯명,- 균형이 맞지 않는다.

게다가 왼쪽에 자리한 사람들의 지체를 봐도 무게추가 왼쪽으로 기우는 건 확연하다. 그런데 그 불균형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바람의 힘', 혹은 '시선이 부여한 힘' 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싸움에서 아마도 승자는 왼쪽의 기녀였을 것이다. 마지막 합을 겨루고도 그녀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고 고요하다.  고수의 승리란 마치 이런 것이라는 듯. 크게 휘청이는 오른쪽 기녀의 몸짓은 크게 흐트러져 뒤로 물러서 비틀거리는 버선이 노출되었다.  거친 숨소리와 치마를 부풀린 바람, 그리고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는 왼쪽 좌중의 사람들의 시선이 치마를 밀어간 그 바람의 결대로 밀려갔다. 

그 시선의 방향대로 관람자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이 무게가 부족한 균형을 맞추었다. 뿐인가, 왼쪽 양반들의 시선에서 시작하여 중간 승자가 된 기녀를 중심으로 찍고 시선은 위에서 아래로, 좌에서 우로 관람자의 시선을 끌고 가 화면에 역동성을 주는 것, 역시 혜원의 힘이다. 뿐인가.  나란히 일열로 앉은 악공들 중에서도  일방적으로 흐르는 시선을 혼자 받아내고 있는 짙은 색 의상의 오른쪽 아래 고수와  사선으로 맞닿아 (\) 기울어진 무게중심을 보완하였다.  중앙 무대의 기녀들의 역동적인 춤사위를 더 한층 돋보이게 하는 구도이다.

 

분명히 평면의 화폭인데 관람자의 시선을 끌고 다니며 그 시선들 사이에 바람을 흘려 아름다운 기녀들의 화려한 치맛자락을 부풀리게 한 솜씨가 과연 혜원이지 않은가. 이 바람의 처리는 보티첼리의 명화 라 프리마베라(http://blog.daum.net/salttear/2507)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나는 자신한다.


 

이 기녀들의 의상을 다시 실사로 구현해놓았다.

의상대 아래 바람 구멍을 내어 옷자락이 흔들린다.

의도는 좋았지만 어쩐지 이건 좀 부족하다 싶다. 평면의 원작보다 오히려 생동감이 떨어진다. 어찌된 연유인가?

아마도 위에서 보았던 그 밀어가고 휘청이던 살아있는 바람의 힘이 느껴지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치맛자락을 간간 흔드는 인공적인 바람은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다.

 

 

각설하고 -

 

이번 전시의 백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혜원화첩을 하나로 모아서 각 그림마다 단 태그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ㅎㅎㅎㅎ



어쩔거야 ㅋㅋㅋㅋㅋ


 


 

학예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문구를 궁리했을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전신첩 앞에서 태그글을 읽는 재미가 각별하다.

그림 속 이야기를 축약한 문구가 참으로 적절하고 재치만점이다.

 

 


타이베이 고궁박물관에서 우리 화첩의 상함을 슬퍼하였더니 혜원화첩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연소답청을 보면서 봄바람을 본다.

나들이의 목적지에 다다른 이들과 급히 달려간 아래쪽 기녀와 선비의 몸짓을 보라지.

정과 동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흥에 겨워 신분의 엄중함은 개나줘버리고  말구종의 저고리를 벗기고 기생의 시중을 들고 앉았는 작태가 한심하다 할 수가 없다.

봄날의 청춘들의 흥은 다 용서가 된다. 신분을 파격시킨 이 봄기운 낭자한 들판에서 어쩔 줄 모르고 힘든 것은, 옷은 바꾸어 입었으되 감히 양반의 갓을 쓰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따르는 말구종 뿐이다.

 


어줍잖은 소설을 쓸 때 혜원의 그림은 때로 기록된 사료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파격의 진홍 도포가 위세를 부리던 별감의 입김을 보여준다.

 


월하정인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아마도 이 그림은 원래 반을 접어서 감상하던- 요즘말로 팝업그림이 아니었을까?

한중간의 접힌 흔적이 이 의심을 더 강하게 한다.

야삼경 은근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이 연인들은 달빛이 쫓아오지 않는 담장 아래에 서 있다.

휘영청 밝은  빛을 구름 속에 반나마 숨긴 달의 배려가 고맙다. 참말로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 일이지. 화려한 색으로 주인공들의 심리와 상황을 표현하기에 주저함이 없던 혜원이 여기서는 달빛처럼 은은한 색을 주로  썼다.

 여인의 소매끝동과 신발,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밝히는 길밝이등의 붉은 빛만이 한낮에 나란히 서지 못하는 연인을  물을여 줄 뿐이다.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 보면 이 그림을 보고 영명한 정조께서 대노하신다.

뛰어난 화원의 그림 한 점, 그리고 그 그림 한점으로 관리의 만연한 부패를 알아챈 정조. -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그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화면 가운데 얼굴이 넓적한 아저씨 ^^;

장안의 왈자였던 별감들과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이 거의 비슷비슷한  왈패들이었을테다. 대낮에 선술집에서 시끌벅적 술판을 벌이며 흐트러진 옷자락 따위는 아랑곳인 이 유쾌한 아저씨, 이 비슷한 얼굴을 우리는 프란츠 할스의 <유쾌한 술꾼> (http://blog.daum.net/salttear/2519)을 통해 먼저 만났다.

 


동네 사람들아! 여기 난리가 났어요!

선술집에서 술잔 나누며 놀땐 좋았지, 난장 끝이 종내 이렇게 된다.

점잖은 양반체면이 다 뭐래. 웃통은 아예 다 벗어제꼈고 갓은 부서져 나뒹군다. 주자의 예가 어떻고 사대부의 도리가 어떻고 하던 양반들의 난장판을 장죽을  물고 바라보고 있는 기생의 속마음이 잡힐 듯 하다. ^^


구태어 끼어들지 않고 넌지시 바라보는 기생의 눈길, 아마도 혜원의 마음이지 않았을까.

투호나 쌍륙을 하는 그림을 보면 혜원이 진정으로, 조선 신분제에서 가장 하층에 자리잡았던 이 여인들을 얼마나 애틋하게 사랑하였는지를 알겠다. 육간대청에서 큰 소리를 치며 근엄하게 잘난 체를 하던 사대부들은 기녀와의 내기에서 사생결단을 하고 달려들고, 그 대단한 체면따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잣거리에서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싸움질을 하고, 은밀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양반들의 주연 자리에서 표정없이 앉아 있거나, 그야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새서방나리의 농탕질에 속절없이 속을 끓이는 여종의 처지거나,- 많은 부분에서 그들은 자기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수무책으로 성의 도구나 대상이 되어버리는 일이 많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녀들은 그 위선과 가식을 바라보며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靜과 動, 意와 情, 단단함과 부드러움, 고여있음과 흐름, 엄격함과 자유로움-

우리 문화의 양 극단을 따라가보면 왼쪽에 훈민정음을 두면 그 반대쪽에 혜원의 단오풍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Z자로 흐르는 시냇물굽이. 노랑저고리 다홍치마,  이 그림의 주인공이 탄 그네가 매어진 나무 둥치가 요상하다.

참으로 얄궂은 형상이 아닌가, 그 아래로 흘러가는 시냇물이라니.  화면 가득 음기가 흐르고 여인들은 아예 붉은 젖꼭지를 드러내고 뽀얀 나신을 서슴없이 드러내었다. 흰 무우보다 싱싱하고 어여쁜 팔뚝들과 허벅지들. 젖은 몸과 삼단같은 머리칼들, 돌 사이를 콸콸 흘러가는 물소리들 사이 까르르 웃는 젊은 여자들의 목소리가 물방울처럼 튀어오른다.


예의 한 道로 활터를 다녀오던 헌헌장부 사대부, 부처의 길을 따르던 동승들도 어찌 버틸 수 있으랴.

바야흐로 계절은 춘정이 난만한 오월이고  박속처럼 고운 저 젊은 여인네들의 속살이 발길을 옭아매고 물가로 이끄는데.




생각보다 관람객이 적어 마음껏 호사를 누리며 꼼꼼하게 볼 수 있었다.

이런 복이라니!!


혜원 전시실을 마치고 나오는데 미디어아트로 나오는 그림들도 생각보다 괜찮다.




다음 관은 정선.

다니다보면 화가 이름을 보지 않아도 겸재의 그림임을 단박에 알겠다.

둥그러운 산하의 선들, 모연 속에서 완만하고 다가오고 번지는 이 특유의 양감.

안개비 속에 아련히 잠긴 장안을 보노라니, 조선 말 청전의 모연이 떠오른다. 청전의 모연은 쓸쓸하고 고적하고 어딘지 슬픔이 느껴지는데 겸재의 연우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여백으로 처리한 공간은 그것이 미완성이 아니라 오히려 산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가리는 구름의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이다.

아름답지 않은가. 비우고 멀어짐으로써 가득차고 완성되는 이치라니.




겸재의 한양화첩에 현대의 서울을 겹쳐놓으니, 어쩌면 지금의 우리는 그 숨쉴 공간마저 다 닫아버리고 종내는 밤하늘의 숨구멍까지 막아버린 꼴이 아닌가 싶다.

숨이 막힌다. 애써 고개를 치켜들지 않아도 눈썹 끝에 매달리던 푸른 들과 흰 구름은 커녕, 캄캄한 밤 하늘 조차 한뼘 넉넉한 여유로 남겨놓지 못한 현대문명.




겸재의 그림을 보며 탄복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분명히 저 능선들을 실제로 이렇게 다 내려다보며 그릴 수 있는 물리적 위치에 서 있지는 못했으리라.

왼쪽의 '그림'에 비해 완벽하게 실사로 구현된 '사진'은 오히려 답답하고 '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드론을 띄워 그 위에 올라탄 화가의 눈으로 금강을 내려다보듯, 허구의 구도, 실존하지 못하는 신선의 시선으로 내려다 보는 부감의 생생함이라니.




겸재가 우리 산하를 얼마나 다정다감하게 바라보았는를 다시 느낀다.

화면 가득 넘실거리는 동해의 물결, 바닷가에 자리한 누각의 단정하고 부드러운 지붕선들- 바닷바람이, 해변의 냄새가 화폭 밖으로 스며나온다.



정말 좋은 전시였다.

간송이야 다시 말하지만- 언제나 진리다.


그 중에서도 혜원은 우리 미술사의 가장 아름다운, 가장 빼어난 꽃이다.

그가 그려준 그 아름다운 옷자락처럼.